한남대 명예교수

 

이러한 인사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하고 살까? 내가 그렇게 누구에겐가 묻는 것은 얼마나 되며, 내가 누구인가로부터 그렇게 질문을 받은 때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묻는 나는 진정으로 그의 안녕이 궁금해서였을까? 그냥 우리의 인사법이 그렇게 하는 것이니 그냥 따랐을까? 그렇게 누구인가가 물으면 ‘예, 잘 지내요’라고 건성으로 받아넘길 때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할 때 그렇게 물은 그는 그 대답에 만족하였을까? 다시는 그렇게 묻지 않겠다고 야무지게 맘을 먹을 만큼 실망감을 넘어 어떤 배신감 같은 것을 가지지는 않았을까?

그런 질문과 대답과는 달리, 나는 누구에겐가 또는 어떤 것에다가 헤어지는 의미로, 그러니까 완전히 작별하고 떠나는 의미로 ‘안녕!’이라고 아주 진지하게 말해 본 적이 있는가?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모든 것을 아무런 아쉬움 없이 보내는 의미로 쓰는 ‘안녕!’ 진정으로 ‘잘 가시오’ ‘잘 있으오’ 하는 의미로 ‘안녕!’이라고 말 해보았는가? 그렇게 했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나는 요사이 작가 한강 씨가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른 ‘안녕이라 말했다 해도’를 몇 번 반복하여 듣다가 갑자기 안녕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해 보아야 하겠다고 느꼈다. 그런데 정말 지금 우리 시대 이 사회에서는 진정으로 ‘안녕하십니까?’라는 만나는 인사와 ‘안녕!’이라는 작별 인사가 아주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원자력발전소 근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안녕하십니까’ 하고 물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물론 그 주민들은 원자력발전의 전문가들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생활인이라고 할 때 그런 질문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신고리 5호기와 6호기 건설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중단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깊이 하여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지어나가야 한다는 권고안을 만든 시민공론위원들은 ‘안녕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할까? 정말로 안녕하였기에 건설계속을 편들었을까? 자기가 살고 있는 곳과 아주 멀리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안전하다고 느껴서 그렇게 한 것일까? 들어간 돈이 상당히 많고, 그것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기 때문에 현실을 따져서 어쩔 수 없이 안녕하다고 맘먹기로 작정하여 그렇게 결정한 것일까? 그러면서 또 원전은 차차 축소해 언젠가는 ‘안녕!’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낸 것은 정말로 원자력발전소가 불안을 넘어 안녕하기를 바라서 한 것일까?

또 다른 나라에 사는 친구들이 핵무기 문제로 미국과 북한 사이에 오고가는 맹렬한 말폭탄과 전쟁가능성에 대한 불안한 위기상황에서 우리에게 ‘안녕하십니까?’ 하고 물을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아침에 아무런 일 없이 일어나고, 저녁에 다시 아무런 일 없었던 듯이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안녕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안녕하든 불안하든 본인이 어떠한 길을 걷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 손을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안녕하다고 여기자는 맘일까?

정권이 바뀌기 전부터 정치권에서 많이 오고간 말은 ‘적폐’라는 것이었다. 내가 풀어내야 할 문제를 보거나 그 문제에 스스로 직면하였을 때,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하여 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아니 전 정권부터 관행처럼, 우리 사회의 문화처럼 내려와 쌓이고 쌓인 폐해라는 뜻으로 쓰는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화살을 돌리기 위한 것이었든,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어떤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든 그 적폐라는 것에 자신은 ‘안녕하다’고 느낄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금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서로 주장하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안녕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런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하여 안녕할 것도 아니고, 나는 그 적폐라는 것을 밝혀내는 시기나 부문에서 멀다고 안녕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적폐라는 것들은 긴 역사를 지나오면서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함으로 안녕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을 진정으로 ‘안녕!’이라고 미련 없이 떠나보내야 안녕할 것이다. 이것은 자기혁명으로부터 나와야 할 것이다.

안녕의 문제는 결국 이상과 현실, 참과 거짓, 가질 것과 버릴 것 사이에 우리가 느끼고 결정하는 문제들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진정으로 우리가 안녕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안녕!’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끝없는 욕망체계로부터 ‘안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주 탁월한 가공할 무기로 탄탄한 방위체계를 가지면 안녕할 것이라는 착각으로부터 ‘안녕!’해야 할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전 세계의 시민들 속에 깃든 평화의 맘을 감쌀 때 안녕하다는 것을 경험해야 하지 않을까? 평생 걱정인 무엇을 먹고 입고 어디에서 잘 것 인가로부터 ‘안녕!’할 길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위대한 스승들은 그런 걱정들을 버리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란다. 그것이 안녕할 기초란다. 그렇다. 그래서 핵무기 대신에 한 송이 향기로운 꽃으로 안녕할 세상을 찾자. 저놈은 죽어야 마땅할 놈이라고 저주하는 대신 그도 존경할 만한 생명을 그 속에 가졌다고 놀라워하고 감사하는 향기로운 말 한마디를 내놓자. 핏발 선 분노의 눈빛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서기로운 서로 불쌍히 여기는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자. 그래서 거기에 평안이 있구나 하는 안녕을 찾아보자. 겉이 아니라 속으로부터 나오는 안녕을 위하여 ‘안녕!’할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찾아보자. 모든 무기는 ‘안녕!’으로 보내고, 모든 씨알에게 깃든 ‘화평한 맘’은 ‘안녕?’으로 맞이하자. 안녕?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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