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덕스러운 사람, 감정이 여기저기로 어떻게 뛸지 모르는 사람을 친구나 애인 혹은 동료로 둔다면 그것처럼 힘든 일도 없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절제된 인내를 보여주는 사람도 드물게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만으로 말이다. 만약 플라톤이 그런 사람과 같이 있다면, 그는 단지 그를 혐오하고 욕을 했을지 모른다.

플라톤이 할 수 있는 충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그는 운동하고 좋은 음악 열심히 들어라’, ‘시나 소설, 연극 같은 것 보지 말고 아니 뮤지컬이나 영화는 더 더욱 피해’, ‘책 좀 읽고’ ‘그래야 네 영혼을 가꿀 수 있어’

플라톤은 다중지능이니 EQ라는 개념도 몰랐고 조울증과 같은 의료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렇다고 그를 감정의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 못한 ‘못 난 사람’, ‘감정에 대한 결벽증과 이성에 대한 강박’을 보였던 사람으로만 취급할 수 없다. 그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왜 그럴까?

플라톤은 그의 영혼론에서 감정의 문제를 다룬다. 플라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중기 작품인 『국가』 에서 영혼은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눈다. 이성적인 부분, 욕구하는 부분, 기개적인 부분이 그것이다. 이성적인 부분은 추론과 같이 논리적인 것을, 욕구하는 부분은 굶주리거나 목마른 등과 같은 신체적인 욕구를, 가재적인 부분은 분노, 명예, 용기, 두려움, 공포, 시기 등과 같은 감정부분을 담당한다.

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초월적 의의 영혼개념 혹은 영혼=정신과 같은 의미에서 영혼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기능 혹은 사용의 관점에서 영혼을 분절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영혼의 세 부분이 반드시 기계적으로 독립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에 의해 욕구는 어느 정도 관리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재적인 부분은 관리하는 데 애를 먹는다. 제압이 쉽게 되지 않는다. 여기서 플라톤은 제압이 결코 쉽지 않은 감정을 아주 감정적으로 다룬다. 감정을 혐오하는 대로 나간다.

감정에 대한 혐오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호머에 대한 부분이다. 그는 아테네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시인 중에 시인, ‘비극작가들의 최초의 교사’인 호메로스(Homeros)를 심판대에 불러낸다.

플라톤은 이들이야 말로 본성의 제작자인 신을 모방(mimesis)하는 자들에 불과한 일을 하는 자들이다. 화가는 진실의 세계(이데아)에서 신이 만든 침대를 모방한 목수의 침대를 보방한 자이고 호메로스와 비극시인은 언어의 모방자일 뿐이다. 호메로스는 진실을 파헤치는 자가 아니라 기껏해야 진실의 세계의 그림자를 자기 식으로 베끼는 인물들인 자들이다. 플라톤은 참된 세계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모방을 일삼는 호이들을 포함한 호메로스를 ‘사기꾼’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멍청하게 속아 넘어가고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를 참된 세계, 진실로 믿는 사람들의 ‘무지’함을 들추어낸다.

특히 호메로스는 ‘언어라는 물감’으로 장난해 사람들의 분별력을 헤치는 자이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 기쁨과 즐거움을 모방함으로써. 여기에다 플라톤은 결정타를 날린다. ‘시인은 모방하는 것이 좋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할 뿐더러 자기가 창작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왜냐하면 시인은 감정의 나라에서 살며 그 감정의 유희를 즐기는 자, 영혼의 가장 열등한 부분인 기재적인 부분에 불을 떼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자이기 불과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호메로스와 같은 시간이 아테네에 기여하는 것은 아나도 없으며 아테네 시민의 열등함을 재생산하는 자이다라고 최종판결을 내린다.

그렇다면 왜 플라톤은 이토록 호메로스를 싫어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설은 감정의 폭풍으로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아테네인들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참주정치 및 관료들에 대한 혐오가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플라톤이 그린 새로운 아테네 사회는 감정이 완전히 관리되고 절제된 기질의 소유자들이 사는 사회이다.

다른 말로하면 그것은 이성이 지배하는 새로운 아테네 사회의 건설이라는 큰 밑그림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플라톤식 아테네 문화정책 설계안의 차원인 셈이다. 시는 낮은 문화를 낳고 아테네 시민의 교양 수준을 하향 평준화시키는 사이비 예술을 상징한다.

시를 몰아내는 것이 플라톤 문화정책의 핵심인 셈이다. 호메로스 역시 ‘한 사람’으로 플라톤은 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호메로스는 그로 대변되는 아테네 감성문화의 다른 이름이다. 플라톤은 감성문화의 해체자로 이성문화의 정초자를 자임하며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한다.

“국가 제도의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들은 더할 나위 없이 바른 방법으로 나라를 건설해 왔다고 생각하지만, ... 도시의 문제에 관해서 결정을 생각할 때 ... 도시 속에서 모방적인 것은 결코 허용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일세. 영혼의 세 부분을 각각 별도로 구분한 결과 지금이야말로 모방적인 시를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뚜렷해졌다고 나는 생각하네.”(국가, 10권, 1)

그렇다면 플라톤이 그리는 새로운 아테네 사회, 모방이 아닌 진실을 발견하는 아테네 시민을 위한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가 쉽게 짐작 할 수 있듯 그것은 바로 철학의 나라(이성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곧 생각하는 힘, ‘모든 것을 바쳐서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도록 힘을 기르는 일이다. 여기서 깜짝 놀랄만한 반전이 일어난다. 언어의 마술로 시를 사랑하게 만드는 호메로스를 처단한 플라톤이 철학함(진리를 사랑함)을 그만큼 문학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영혼이 모든 것을 바쳐서 그와 같은 존재를 추구하고 다름 아닌 그 충동의 힘에 의해서 지금 가라앉고 있는 바다 밑에서 끌어올려져 바위나 조가비 등의 부착물”(국가, 10권, 11) 을 떼어내라고 강권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시로 대표되는 모든 예술을 플라톤이 폄하 한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그래도 ‘음악은 들어라’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음악에서 좋은 리듬과 화음은 영혼 속에 들어가 영혼에 균형과 질서를 주고 사람으로 하여금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플라톤이 추천하는 음악은 좋은 음악이다. 좋은 음악은 좋은 가사와 가사에 맞는 리듬과 율동이 있어야 하며 조용하며 리듬의 변화가 심하지 않은 음악이다.

좋은 음악은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음악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음악이다. 가슴을 뛰는 타악기가 많이 들어가는 음악, 작곡기법이 복잡하며 장식음을 뽐내는 음악은 좋은 음악이 아니다. 포퍼먼스 시에도 즉흥연주는 허용되지 않는다. 락, 재즈, 광고음악, 드라마 OST, 아이돌 음악, 노래방 인기곡들, 트로트는 플라톤이 제일 싫어하는 음악일 것이다. 플라톤이 좋아하고 우리들에게 권하는 음악은, 클래식과 명상음악 등이다.

아마도 플라톤은 바그너, 쇼핑이나 말러,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클래식도 싫어하지 않았을까? 그는 하루 종일 바흐나 텔레만 등의 바로크 음악만을 들었을 것이다.

음악만이 아니라 운동도 영혼의 균형미를 갖추는 데 추천할 수 있다고 플라톤이 말했기 때문에 플라톤이 좋아하는 사람은 이어폰 끼고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산책하는 사람, 산책하고 돌아와 자신의 쓴 책을 읽을 사람일 것이다.

<이하준 한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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