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대전민예총 이사장

 

지난여름 무더위 못지않게 지역의 대학가를 뜨겁게 달군 뉴스는 바로 한남대의 서남대 인수 추진이었다. 동문들이 오랜 숙원인 의대 설립 실현을 기대하는 데 반해, 경쟁 사학들은 한남대의 열악한 재정 지표를 훤히 알기에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수시모집을 앞두고 지명도를 높이려는 거란다.

나도 1970년대에 대전의 변두리인 오정골에서, 나사렛이란 변방에서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한 예수를 배우며, 누추한 주변인인 ‘마지널 맨(Marginal man)이 세상의 당당한 주인이 되는 가능성에 가슴이 달아오르곤 했다. 이렇게 한남가족의 한 사람으로 의대 설립의 꿈을 잘 알지만, 예수교장로회 교단 목사들이 대다수인 학교법인이 서남대 인수에 도움을 줄 형편은 아니기에 그 실현 가능성이 미심쩍었다. 더구나 학령인구의 급속한 감소로 내후년부터 대학 입학 정원이 고교 졸업생보다 많아지는 이른바 ‘역전 현상’이 시작되고, 앞으로 5년 후면 학령인구가 100만 명이 줄어드는 현실에서 빈사 상태의 부실 사학을 떠안는 게 쉽게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론기사의 사실 여부는 조금만 노력하면 알 수 있다. 가령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한남대의 서남대 인수자금 대출이 논의될 거라는 학교 관계자의 말이 사실인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홈페이지를 찾아보면 된다. 전국에서 1500여 명의 대의원이 참석하는 총회라 모든 안건이 홈페이지에 사전 탑재되는데, 여러 번 확인해 봤지만 한남대 자금 지원 안건은 없다. 또 총회연금재단 홈페이지를 찾아보면, 그간 투자 관련 사고가 많아 기금운용방식이 전문투자사 위탁방식으로 바뀌었고, 기금운용위원회에서 투자의 타당성과 자금회수 가능성 등을 따져 결정하면 연금재단 이사회는 이를 추인하는 식인데, 연금재단 이사회의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는 등 금방 성사될 듯 분위기를 만든다. 하지만 막상 인수자금 대출이 불발로 끝나자, 대학 측이나 언론 그 누구도 그간의 어설픈 추진과정에 대해 한마디 반성도 없다. 오히려 ‘플랜 B’ 운운하며 끝까지 추진하겠다는 소식을 전하며 자신들의 진정성을 강변하니, 정말 큰일이란 생각이 든다.

‘플랜 B’로 서남대 구성원과 남원시민에겐 희망고문이 조금 연장됐다. 하지만 전북의 금융계나 언론계는, 내년 지방선거를 의식한 주민 무마책이자 일종의 퍼포먼스라며 냉담하게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 전북은행의 한 지점장은 남원시의 제1금고인 농협과 제2금고인 전북은행이 시와 보조를 맞추겠다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조건이 되면 대출하겠다’라는 식의 지극히 원론적인 얘기라며 크게 의미를 두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전북의 한 기자는 교육부의 대학제도과 담당자와 통화해 보니, 한남대의 자기자본금 확충 없이 외부차입금에 의존한 정상화계획서는 결국 승인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전했다.

사실 예장총회연금재단의 자금 지원이 불발됐을 때가 출구전략의 적기였는지 모른다. 그간 인수를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이렇게 돼 아쉽다면서 빠져나오면 남원시와 서남대 관계자들을 달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애초에 능력이 안 되는데도 끝까지 가보겠다는 맹목적 확신은 일종의 자기기만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렇게 출구를 막아버리면 결국 엄청난 책임 추궁이 불가피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학교 내 구성원들의 인내도 임계점에 와 있기 때문이다.

죄의 근원을 뜻하는 헬라어는 휴브리스(Hubris)로, 스스로를 과도하게 부풀려 자신을 모든 일의 중심으로 여기는 것을 뜻한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휴브리스를 보편화해 이렇게 경고한다. 성공으로 인해 교만해져 남의 말에 귀를 막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판단력을 잃어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된다고. 새떼에 부딪혀 엔진에 불이 나 뉴욕 허드슨강에 불시착해 승객 전원을 구조한 설리 기장은,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필요한 208초 동안 오직 155명 승객의 안전만을 생각했다고 한다. 진정한 리더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죄의 근원인 자만에서 벗어나는 길은 성공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예수가 촉구하는 회개인 메타노이아(Metanoia)는 죄의 뉘우침을 뜻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새롭게 세상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사적 이해보다는 공적 가치를 중시하고, 우리 곁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예수의 가르침인 메타노이아의 실천은 한남대 정문에서 찬바람에 천막생활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규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해방신학을 깊이 연구한 총장의 메타노이아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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