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우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전 위원장

 

지난 10월의 마지막 일요일. 세찬 바람에 은행이 두두둑 무더기로 떨어지던 날이었다. 앳된 학생이 대전시청 앞 천막농성장에 찾아왔다. 월평공원특례개발 반대를 위해 주민과 진보정당, 시민단체들이 설치한 천막이었다. 학생은 오자마자 서명용지를 달라고 하더니 혼자서 둔산타임월드 앞으로 갔다. 그리고 오가는 시민들에게 반대 서명을 받았다. 일요일에는 천막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도 드문데 그 학생의 활약으로 몇 장의 서명용지를 금세 채웠다.

학생이 천막에 돌아왔을 때 비로소 그의 얘기를 듣게 됐다. 2000년에 태어나서 이제 18살이라고 했다. 충북 영동군에서 학교 친구들과 농업과 생명과학 동아리를 만들어 직접 농작물을 심고 수확하면서 탐구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1년 전에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을 바로잡으려고 전국에서 촛불이 타올랐을 때 그는 촛불집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홀로 영동에서 기차타고 대전까지 오갔다. 촛불집회에 성금을 내고 왕복 기차표를 사기 위해서 부모님께 돈을 달라 하지 않고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촛불집회는 전국이 난리였으니 그렇다 치고 대전시청 앞의 천막농성장은 어떻게 알게 됐냐고 물었다. 우연히 페이스북을 보고 알게 됐고 때마침 대전에 올 일이 있어서 한나절쯤 함께 하려고 낯설지만 무작정 왔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농성장에 라면이 없다는 얘기를 페이스북에서 보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받은 돈으로 라면을 사오려고 했었고 다른 사람이 먼저 갖고 온 것을 알고는 대신 귤 한 상자를 사왔다고 겸연쩍게 말했다.

학생의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입을 쩍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어른들도 혼자서 하려면 망설이게 되는 행동을 그는 서슴없이 실천했다.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청소년 노동착취가 심하다는 사실을 듣고는 혼자서 실태조사를 하기도 했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새로운 학생을 소개해 달라 하면 최저임금은 꼭 챙기도록 했다. 이번 겨울에는 무주리조트와 근처 스키장비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에 대한 노동인권 문제를 조사해보고 싶다고 했다.

학생을 만나고 나서 1주일쯤 지나 그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불과 1주일 사이에 무주리조트와 스키장비 대여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소년에 대한 노동인권 침해 상황을 나름대로 조사한 보고서였다. 스키장에 가서도 무심코 지나쳤던 아르바이트 노동자들 중에 중고생들이 많다는 사실을 보고서를 보고 비로소 알았다. 스키장에서 하루 8시간 일하고 받는 임금은 4∼5만 원 수준이고 스키장비 대여업체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면 40시간 이상 일하고 15만 원쯤 받는다는 것도 알았다.

학생은 이 보고서를 통해서 스키장과 스키장비 대여업체에서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을 공공연히 어기고 있으며 이를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보고서로만 끝내지 않았다. 촛불집회 1년을 기념하는 집회에 참석해 발언을 자청하고 청소년 노동의 문제를 말했다. 청소년 100명 중 7명이 노동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청소년에 대한 7시간 초과 노동, 야간 노동, 최저임금 미지급, 근로계약서 미작성 등 노동인권을 유린하는 행위가 자주 발생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알게 하는 교육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중·고등학교에서 청소년 노동인권 교육을 해야 청소년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학생을 처음 만난 지 아직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사이에 내가 그를 통해 배우고 깨친 것은 진보적인 활동가들에 견주어도 결코 적지 않다. 40년이나 젊은 스승을 만난 셈이다. 인권의식으로 다진 열정, 의지, 행동이 그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꿈을 하나하나 이루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고마운 마음으로 그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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