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암 행정학 박사

 

‘우리’, 자기와 함께 관련되는 여러 사람을 다 같이 가리킬 때, 또는 자기나 자기편을 가리킬 때 쓰는 말. 사전적 의미의 해석이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라는 말을 아주 흔하게 사용한다. 우리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정감 있고 편안하게 들린다. 그래서인지 ‘우리’안에 자기가 속하길 원하고 ‘너희’가 되기를 싫어한다. 한데 ‘우리와 너희’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각자의 입장에 따라 ‘우리와 너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차의 구별이 없다는 말도 있다. 창을 사이에 두고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밖이고,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밖인데 세상만사 피차의 구별이 있는가.

우리와 너희가 세우는 대립각, 각자의 입장에 차이만 있을 뿐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인가. 그래서 ‘우리’와 ‘너희’가 아닌 제 삼자가 더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우리가 ‘우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가 편안한 정감 때문일까? 우리가 무시로 내뱉는 ‘우리’라는 말에 혹시 패거리 문화라고 하는 집단주의적 심리가 깔려 있다면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위험한 미소를 경계해야 한다. 나와 네가 모여 우리라는 무리를 만든 뒤 우리가 아닌 다른 무리를 따돌리고 배척하겠다는 그들만의 치사한 즐거움 말이다. 초록은 동색, 유유상종, 나와 같으면 우리가 되고 다르면 너희가 된다. 그럼으로 우리가 되고 싶으면 우리와 맞추고 우리에게 아부를 하라.

학연과 지연, 혈연과 인종, 각종 모임, 코드정치 및 인사, 그리고 그 무엇 무엇들이 통합을 표방하며 ‘우리’를 강조하지만 사실은 통합을 깨는 주범이 이러한 연(椽)이라는 것들이다. ‘우리’가 갖는 기득권은 힘이 없는 ‘너희’에게 온갖 방법을 동원한 폭력을 휘두르며 말할 수 없이 불만족스러운 눈빛으로 팽(烹)시킨다. ‘우리’가 커다란 힘을 가질수록 수많은 ‘너희’와 공정한 경쟁을 하지 않고 무자비한 차별과 억압을 하며 같은 공간에서 마음대로 숨을 쉬지도 못하게 한다. 이렇게 될 경우 통합을 위해 ‘우리’가 된 우리는 국가와 인류역사의 발전에 방해만 되는 패거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연의 생태계는 서로 다른 다양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인간의 무리가 아닌 자연생태계에도 각기 다른 무리가 있고 생존을 위해 투쟁을 하지만 인간처럼 일부러 ‘우리’를 만들어 갈등을 조장하지는 않는다. 갈등이 증폭되어 다양성을 잃어버리면 결국 소멸하고 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이 ‘우리’의 비겁한 힘을 함부로 사용해 통합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우리의 얼굴은 결국 불신과 교활함으로 추잡하게 변해버릴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우리’라는 말이 얼마나 좋으면 배우자를 지칭할 때도 ‘우리남편, 우리아내’, 애인을 지칭할 때도 ‘우리애인’이라고 하겠는가. 이때는 우리가 아니라 ‘제 남편, 제 아내’, ‘제 애인 또는 제 여자친구, 남자친구’라고 하는 것이 맞다. 우리가족, 우리친구, 우리학교, 우리교회, 우리 절, 우리회사, 우리모임, 우리정당, 우리민족 등 우리가 무시로 사용하는 ‘우리’라는 말에 숨어있는 배타적 집단심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라는 말이 마냥 따스하고 좋은 말만은 아닌 듯하다. 우리가 생각했던 우리의 본 모습을 지켜가려면 너희를 포용해 상생코자 하는 관대함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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