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석 수필가

며칠 전이다. 한 신문에서 ‘KBS 방송 독립성 훼손, 국민이 나설 때’란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KBS 이사장이 언론노조로부터 퇴진 압박을 받는 데 대한 부당성을 호소한 글이다. 본란 ‘금강의 창’을 통해 필자는 ‘KBS가 국민한테 이래도 되나’(본보 9월 22일자 2면)란 글로 제작거부 파업투쟁을 벌이는 KBS 사태의 부당성을 지적한 바 있는데, KBS는 국민들로부터 준조세적인 시청료를 거둬들여 운영되는 공영방송사다. 사장과 이사장을 쫓아내려는 시비는 어디까지나 조직 내부에 국한돼야 할 문제다. 내부 갈등을 이유로 시청자인 국민의 시청권을 짓밟는 행위는 횡포이고, 그로 인한 피해는 온통 시청자 몫이다. 공영방송 노조원들이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다.

오죽하면 이사장이 내부 갈등에 부끄러움 무릅쓰고 “KBS 문제는 이제 KBS인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라며 “공영방송의 진정한 주인인 국민이 직접 나설 때”라는 입장을 밝혔을까. 엄밀히 따지면 이사장, 사장은 KBS 운영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음에 대한 책임의 장본인들이다. 이 시점에 책임을 변명하려 한다면 그것도 잘못이다.

KBS를 아예 폐업, 해산시킨 후 어쩔 수 없는 입장을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게 순서다. 노조원들의 제작 거부로 정상적 방송이 불가능하다면 국민들도 굳이 강제적으로 시청료를 물어가며 KBS 시청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보도에 따르면 KBS 종사원 5000명이 연간 1조 5000억 원의 예산을 쓴다고 한다. 모두 국민들로부터 거둬들이는 혈세다. 말로는 국민의 방송이고, 국가기간방송사를 자처하면서 툭하면 국민의 시청권을 볼모삼아 제작거부투쟁을 하고, 날마다 편법방송을 반복하는 것은 대국민 사기극이다. 이사장은 “KBS가 거대한 공룡처럼 스스로 몸도 가누지 못하게 된 지 이미 오래된 일”이라며 “방송사가 정치권력의 부당한 간섭을 막아내지 못하고, 노조 스스로가 정치권력화함으로써 방송인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기 시작했다”라고 주장했다.

또 “과거 정권들처럼 현재 정권도 ‘적폐청산’이란 포괄적 구호 아래 국가권력을 무소불위로 동원하는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도, KBS 노조 측은 방송장악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는 정부 권력의 홍위병 노릇을 자처하는 상항”이라고 지적했다. 사실이라면 KBS는 민주국민의 혈세를 뜯어먹는 반민주언론이다. 민주국가에서 반민주행위는 ‘적폐’다.

누가 누구에게 ‘적폐청산’을 소리치는가? ‘적폐청산’을 반대하는 국민은 하나도 없다. ‘적폐청산’은 시급하다. 그러나 ‘적폐청산’을 내세워 진짜 ‘적폐’를 양성화시키려는 위선적 ‘적폐청산’은 자칫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주적국(主敵國)의 이념에 동조찬양하며 북한을 왕래하던 전과자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는 것 자체도 ‘적폐’다. 우측 깜빡이 켜고 좌측으로 달리는 일부 위정자들도 ‘적폐’다.

6·25 전쟁 역사가 1세기도 안됐다. 전장에서 나라 지키다 적탄에 산화한 우리 부모형제 선대들의 선혈이 아직도 강토 산하에서 질척대고 있다. 오늘의 문명과 풍요를 누가 일궜나. 등 따습고 배부른 지가 얼마나 됐다고 권력 욕심에 혈안이 된 정치집단의 이전투구가 민심 분열을 선동하고, 주적 개념까지 바꿔가고 있다.

국운의 한계인가. 제4부 권력임을 자처하던 언론이나, 입법부 국회의원들 상당수가 본연의 사명에서 일탈하고 있다. KBS 노조원들의 제작거부사태는 단순한 내부 갈등으로 비치지 않는다. 이사장이 밝힌 대로 ‘적폐청산’을 앞세워 방송장악을 위한 통치권력의 횡포에 동조하는 처사다. 언론의 추락이다. 중립을 지켜야 할 언론 스스로 권력에 굴종하는 추태다. 권력 앞에 아부하는 언론이 KBS 공영방송이라면 국민들도 굳이 준조세적 수신료를 물어가며 KBS를 시청해야 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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