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천주교 대전교구장인 유흥식 라자로 주교는 25일 예수성탄대축일을 맞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복음 1장 14절)라는 기념 메시지를 발표했다.

24일 오전 11시 충남 논산 쌘뽈요양원 미사, 밤 9시 주교좌 대흥동성당에서의 예수성탄대축일 전야 미사에 이어 25일 오전 10시 30분 대전가톨릭대에서 이주민과 함께하는 예수성탄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는 유 교구장의 2017년 성탄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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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축복이 여러분과 가족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일 년을 돌아보고 기도하며 대림(待臨,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고 준비함) 시기를 지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믿음의 은총 안에서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나온 하느님의 말씀, 성자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만납니다. 우리보다 더 애타게 우리를 기다리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언제나 자비로운 얼굴을 우리에게 내미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너무 아파 마주 보지 못한 상처까지 먼저 보듬고 위로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 신앙에 비춰볼 때 세상의 어둠이 너무나 짙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가 지나온 일 년이 그러합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전쟁의 기운이 감지되는 현실입니다. 전 세계 정치·외교에서도 차별과 배척의 기운이 관용과 배려의 숭고한 가치를 대체하는 모습을 봅니다. 현대 인류는 개인과 국가 이기주의, 과학기술 만능주의, 경제제일주의 등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탐욕과 지배, 폭력과 쾌락을 부추기는 문화가 마약처럼 번져갑니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섬김과 나눔은 그 자리를 잃어갑니다. 무차별적인 살인이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 등 예수님 탄생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목격됩니다.

전쟁의 위기, 사회적 혼란, 경제적 어려움을 들며, 민주화 노력의 결실까지 폄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짙은 어둠 속에서, 구원과 희망을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오늘 우리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자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실로 대단한 도전이며 위험한 축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던지는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희망의 불빛으로 밝히고 피와 땀이 새겨진 우리 역사의 의미를 조롱하며 묻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왜 축복이며 구원인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직면한 어둠은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격동의 역사를 버텨내는 과정에서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뿌리가 이제 드러나고, 그 힘이 더 크게 느껴지는 현실입니다. 이 지점에 설 때 오늘 우리가 직면한 혼란과 난관이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진리와 진실을 가리는 장벽이 무너지고 악을 직면하며, 진정한 평화와 정의를 향한 연대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인간 존엄성을 지켜내려는 힘들고 긴 노력이 인류의 공존을 향해 도약하는 시간입니다. 민주주의 정신을 실현하려는 불빛이 인류의 공동선과 공동번영을 위한 세계 시민의 연대로 변화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희망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하느님의 손길을 보는 구원의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일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닙니다. 이는 은총의 초대입니다. 이 초대는 내 삶의 전체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는 곧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라는 인격과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이 만남 안에서, 당신 말씀을 선사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 섭니다. 이 만남이 모든 판단의 기준에 하느님의 눈과 마음을 새겨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기초임을 알아보도록 이끕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계획 안에 있는 존재임을 보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자신의 몸이 지닌 가치, 이성, 자유 그리고 양심이란 선물의 가치를 일깨워줍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정의를 실현하려는 열정을 심어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매일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온갖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고 세상과의 화해와 하느님과의 일치에 집중하도록 우리를 지켜줍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만남이 주는 기쁨을 전할 의무와 선물을 부여받았습니다. 가장 큰 과제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당신의 사랑을 나눠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세례만 주는 의미로 한정될 수 없습니다. 선교를 통한 복음화는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말씀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는 데서 이뤄집니다. 이는 인간의 판단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양식 등을 복음의 힘으로 바로잡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결과 오늘 교회가 머무는 이곳,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될 때 진정한 복음화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이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 이뤄집니다. 그러므로 소외받고 고통에 지친 이들이 교회를 통해,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다문화 가족, 이주 노동자, 새터민 등이 교회의 손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를 충분히 받고 형제애를 느낄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우리 대전교구는 교구 설립 70주년을 준비하며 역사적인 시노드(Synod, 가톨릭교회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모여 토론하고 결정하는 회의) 본회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노드가 어두운 한국 교회와 사회의 현실에서 희망을 발견하며, 희망을 심는 작업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시노드를 통해 우리 교회가 어두운 시대의 빛이 되고, 갈라진 땅에 화해와 일치를 심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순교자의 후예로서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위협하는 모든 세력에 맞서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를 옭아매는 모든 거짓과 악으로부터 인간의 이성과 진실 그리고 양심을 해방시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평신도 희년(禧年)’에 한국 사회 곳곳이 복음화로 물들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사회에 번져 갑질이 없고 부정청탁과 부정한 특혜가 없는 사회, 땀 흘린 노동의 가치가 정당하게 인정받으며, 일하는 권리를 위협받지 않는 사회가 다가오길 바랍니다. 오늘은 파멸 직전의 인간이 허리를 동여매고 돌아서서 인간 사이의 화해, 자연과의 화해, 하느님과의 화해의 길을 모색할 때입니다. 핵무기를 확산하며 인류를 공동파멸로 내모는 거짓 평화의 본질이 밝혀질 때, 정의로 다져지는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습니다. 자국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인류가 미래세대를 품으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꿈꿀 때 진정한 번영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 곳 한반도에서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마침내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며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는 현실이 실현되길 바랍니다. 한반도의 위기가 칼을 쳐서 보습(땅을 갈아 흙덩이를 일으키는 데 쓰는 삽 모양의 쇳조각)을 만드는 시대로 다가서는 전환점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소서.

최 일 기자 choil@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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