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직 을지대 교목

새해 아침 아내와 아이를 끌어안으며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어떤 위기가 있을지 모르는 한해를 시작하면서 가족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적지 않은 위로와 용기를 준다. 소설 ‘대지’의 작가 펄 벅은 “가정은 나의 대지다. 나는 거기서 정신적 영양을 섭취한다”고 말했다. 정서와 성품, 인격, 가치관이 형성되는 시작점이 가정이라고 하지만 그보다 행복의 약속이 실현되는 터전이다.

사회에 개인주의가 만연하면서 전통적인 가정 개념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권위적이기는 했지만 가부장적 문화에서 가정해체는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이혼선진국이 됐고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하루 약 300쌍의 부부가 헤어진다고 한다. 감소세에 있기는 하지만 가정폭력으로 피해를 당하는 여성이나 학대받는 아이의 수도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결혼 적령기를 넘긴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 시대 청년들이 가정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지 실감하게 됐다. 청년들은 이구동성으로 결혼을 통해 정말 행복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독립심이 강한 여성들은 시댁 혹은 가정생활을 희생으로 여겨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기고 있었고 남성 역시 가장의 책임을 부담스러워했다.

이해할 수 있지만 동의할 수 없는 건 가정에 대한 청년들의 시각이다. 육아나 가정돌보는 일을 희생이나 가정에 얽매이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또 배우자를 생의 동반자로 여기는 게 아니라 삶을 즐기기 위한 도구나 자기 뒷바라지 대상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가정과 부부관계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면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통계적으로 보면 이혼하는 부부의 상당수는 경제문제로 파생된 갈등이 주된 원인이다. 실직이나 사업실패에 있는 배우자의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기보다 손쉽게 이혼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부 관계란 좋을 때 사랑하고 가난하거나 병들면 외면하는 잇속 밝은 상거래가 아니다. 일본의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이뤄진 가정은 반드시 무너진다”고 경고했다. 가정 본래의 목적이 아닌 또 다른 목적으로 가정이 이뤄진다면 그 가정은 바로 설 수 없다는 뜻이다.

가정은 행복을 캐내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곳이다. 가정은 인간의 품위를 가꾸고 존엄성이 완성되며 삶을 만들어 가는 엄숙한 자리다. 인생의 벅찬 감격과 기쁨은 가정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 가정이야말로 인간만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선(善)인 사랑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가정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 완성돼가는 것이다. 그 사랑은 황홀하고 감각적인 사랑이 아니다. 가정은 사랑의 감성보다 사랑의 책임 때문에 더욱 가정다워진다.

사랑이 지고의 가치를 지니는 건 그 농익은 감성 때문이 아니다. 그 짙은 감성을 책임 있는 영혼이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를 향한 책임을 벗어 던진 감각적인 사랑은 음란이지 결코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가정생활의 육아와 돌봄, 경제활동과 같은 모든 건 결코 희생이나 얽매이는 게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출발이며 삶을 완성해 가는 필연적 과정이다.

옛 말에 화로가 두 개 있는 집은 화목하지 않다고 했다. 화로는 단순히 몸을 녹이는 도구가 아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오순도순 정을 나누던 화로는 생각과 성격이 다른 가족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이었다. 그런 화로가 한 집에 두개 있다는 건 가족 간에 대화와 정이 끊어졌다는 관계성의 적신호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불과 같은 큰 침구를 손수 다리미질했던 과거에는 요를 맞잡은 가족들 사이에 호흡과 리듬을 맞추는 일체감이 필수였다. 서로 다른 성장환경에서 다른 성품을 갖고 있던 며느리, 동서들은 이렇게 다림질을 함께 하면서 가족의 관계성을 익혔다. 이 때문에 다리미를 혼수로 가져가는 법이 없었다. 혼자만의 다리미는 새 며느리의 독립선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새해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판단하는 메마른 시대, 궁극의 절대성을 상징하는 가정의 의미마저 무너진다면 사회 혼란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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