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봉 시인·전 대전문인협회장

문희봉 시인

인생의 행복과 즐거움은 평범한 일상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발걸음을 멈춰 길가에 펼쳐지는 정경을 바라볼 때, 우연히 길을 잃고 헤맬 때, 가까운 길을 오히려 돌아갈 때, 나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인생의 풍경들과 만나게 된다. 사람의 일생은 무척 긴 듯하지만 실은 너무나 짧다는 것을 느낀다.

존경했던 사람이었는데 어떠어떠한 일로 그 존경의 의미가 무너졌을 때의 허망함이란 어떤 것으로도 보상 받을 수 없다. 더구나 정신적 지주로서의 존경의 대상이 물질적인 것에 의해 붕괴됐을 때의 허망함은 그 도가 더욱 진하다. 보석도 볼 줄 아는 사람에게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일수록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간다.

선생님이 귓속말 시험에서 나에게 ‘네가 내 아들이었으면 좋겠구나’라는 말 한마디로 선생님에 대한 존경은 콘크리트보다도 더욱 견고하게 지속되지 않았었는가. 존경받는 어른의 목소리는 찻잔처럼 따뜻하고 녹차향처럼 은은하다. 해돋이 같은 서광을 상대가 내 눈빛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존경을 깨뜨리는 요소는 내 언행에 있지 않을까 한다. 항상 도덕군자처럼 생활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최소한 그에 근접하는 언행을 한다면 금이 가진 않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돌 맞은 유리창처럼 나에 대한 존경이 박살난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평생 쏟은 한량없는 사랑의 앙금으로 응고된 눈빛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희원한다.

친구 간에, 상하 간에, 동료 간에 믿었던 신뢰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면 허탈을 넘어 배신의 경지로 추락해 버린다. 생활의 아픈 멍을 가슴으로 싸안으며 얼굴엔 항시 햇살 같은 웃음으로 어둠을 밝혀주고 고향같이 편안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신뢰가 무너졌다면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믿고 신경을 써주면 누구나 성공의 길로 진입하기가 쉬워진다.

모든 요리 과정에는 정성과 행복과 보람이 스며 있다. 살아가는 데는 물과 공기가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거기다 또 하나 신뢰가 필요하다. 남을 믿지 않는다면 진심이란 있을 수 없다. 나는 이런 말을 한 친구의 우정을 오래도록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정말로 내게 답례하고 싶으면 나중에 곤경에 빠져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냥 지나치지 말고 도와주라.’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친구라면 그 우정도 빛을 발하지 않을까. 사랑을 받으면 싹이 안 틀 수 없다. 하나의 참은 아흔아홉의 거짓을 이긴다.

“잊을 수 없는 결혼 45주년 선물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당신의 마음, 그것이었다”고 말하는 내 아내의 나에 대한 신뢰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사소한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 아름다운 삶은 시작된다. 저물녘 강가를 나란히 다정스레 걸어가는 노부부의 은발 위로 노을빛이 물들고 있다.

친구 간의 우정도 그렇다. 금이 가기 시작한 항아리는 결국에는 깨지고 만다. 발생 초기에 완벽한 치료가 선행된다면 모르되 어느 정도 진행된 다음에는 복원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건 새로 사귀게 되는 친구 간 우정보다 더 걱정되는 대목이다. 강물은 어제처럼 흘러가는데 정다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딘가 잘못된 일이다. 하얀 돛단배가 아침의 건반을 두드리며 지나가는데 어느날 갑자기 차디찬 몰골로 나를 대할 때 상실감에 빠진다. 사랑과 우정은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데서 생긴다. 우정을 키우려면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게 지는 일이 아니기에 내가 솔선해야 할 일인 것이다.

오래 입은 청바지 같고, 낡은 구두 같고, 많이 닳은 가방 같은 사람, 걸치기만 하면 내 몸처럼 내 마음처럼 하나가 되는 사람,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주는 정이야말로 나를 감탄하게 하는 감로수가 아니겠는가? 달빛과 바다의 만남은 사랑이 무르익은 연인 같다는 생각이 아니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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