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6월, 대전도 50만 명 거리로

1987년 6월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정부를 향해 민주국가의 참다운 모습을 보여 달라고 소리쳤다.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권리, 독재 청산을 통한 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쳤다. 그 외침엔 세대의 구분도, 신분적 구별도 없었다. 그 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필사적이었을까. 

2017년 그 광장엔 자욱한 최루탄 연기대신 환한 촛불이 밝혀졌다. 항쟁의 기억이 없는 이들과 30년 전 항쟁의 중심에 서 있던 이들이 꿈꾸는 ‘그날’은 결이 같았다. 불의에는 정의로, 비상식엔 상식으로 맞서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라는 질문에 ‘그렇게 세상은 바뀌었다’고 답할 수 있는 나라, 아직 1987년과 2017년이 꿈꾼 ‘그날’은 오지 않았다. 최근 개봉한 영화 ‘1987’에 관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읽혀진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1. 외침…“호헌철폐, 독재타도”
2. 대전의 6월을 이끈 보통 사람들
3. 1987년 미완의 ‘그날’
 

1987년 6월 10일 대전 중구 대흥동 가톨릭문화회관에서 열린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는 장장 20여 일간 전개된 대전 민주항쟁의 서막이었다. 항쟁기간 연인원 5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학생, 직장인, 종교인, 농민 등 모든 세대가 한마음으로 중앙로로, 도청 앞으로 모였다. 항쟁 6일째인 16일엔 대전 민주항쟁의 주요 거점이던 중앙로를 장악, 경찰의 저지선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고 6·29 선언이 발표되기 사흘 전 은행동 흥국생명 일원에서 열린 국민평화대행진에는 장장 5만에 달하는 시민이 호헌철폐와 대통령 직선제를 외치며 민주화를 향해 달렸다. 

최루탄, 공포탄이 빗발치는 상황 속에서도 시민들은 '나보다 우리’가 살아갈 내일을 걱정했다.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김상택(72·택시기사) 씨는 “내 막내 아들이 막 태어난 시기라 정신이 없었다. 가정도 있는 사람이 최루탄, 공포탄이 날아다니는 거리로 나간 게 무슨 용기였을까 싶기도 하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이후 가만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스스로 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대전 민주항쟁 대열의 맨앞엔 항상 젊은 학생들이 있었다. 충남대, 한남대, 목원대, 배재대 등 대학생들은 자체 투쟁위원회를 조직해 항쟁의 대열을 이끌며 시위 열기를 더 뜨겁게 주도했다. 충남대는 총학생회와 학생 8000여 명이 군부독재타도 장기집권저지 및 민주정부수립 투쟁위원회와 함께 수업거부를 선언하면서 투쟁에 나섰고 같은 날 한남대도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집회를 열고 거리 행렬에 동참했으며 인근 목원대와 대전대에서도 1500여 명이 합류해 시민과 열띤 민주화 열망을 표출했다. 

87년 6월, 지역의 대학생들은 그렇게 대전 민주항쟁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해나갔다. 당시 한남대 투쟁위에 참여한 오재록 씨는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월 호헌조치 이후 전국적 상황과 맞물려 지역 대학에서도 학생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며 “교문 앞에선 늘 전경과 대치하고 화염병, 최루탄이 날아다니는 일이 다반사임에도 학생 대부분이 동참한 걸 보면 민주화 의지가 정말 대단했다”고 기억했다.

20여 일간의 항쟁은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국민의 열망이었던 대통령 직선제를 전격 수용한 6·29 민주화 선언으로 마무리됐지만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날의 기억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지워지지 않고 있다. 1987년 꿈꿨던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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