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가끔 찾아가는 바닷가에 서면 맘이 처연해진다. 신선한 바람과 끝없는 망망한 넓음에 마음이 한없이 확 터지는 기분을 느낀다. 일상에 매어 복닥거리며 살던 모든 찌꺼기들이 파도소리와 바람과 물결에 다 씻겨 나가는 느낌이다. 한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행렬들이 바닷가에 가까이 와서 흰 거품을 일으켜 높은 파도를 줄 때 몰려오는 감동들. 그것에 취하여 있는 동안 나도 모르게 바닷가 한 바위언덕에 선다. 그 바위를 찰싹거리고 때리는 잔파도와 굵은 파도를 보면서 감동하다가 갑자기 무척 지루하기까지 한 답답함을 느낀다. 왜 한 번 크게 몰려와서 후려치고는 말지 줄듯 말듯 감질나게 찰싹거리며 어루만지고 때리듯이 스치는 파도. 그렇게 생각하고 바라볼 때 파도는 늘 그 모양 그 모습이다. 얼핏 내가 딛고 서 있는 바위를 자세히 본다. 호오. 얼마나 긴 세월을 저 파도에 갈리고 닦이었으면 이렇게 오묘한 모습으로 만들어졌을까? 그것을 느끼는 순간 내 마음은 다시 서늘해진다.

그러다 발길을 돌려 모래 위를 걷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모래 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작은 돌들을 찾는다. 아름답고 매끄럽게 생긴 돌들을 찾는다. 어느 것 하나도 모난 것이 없다. 크든 작든 둥그렇게 또는 동그랗게 갈려서 내 손에 착 달라붙는다. 이것보다 저것이 더 낫지 하고 주었다가 던지고 다시 다른 것 하나를 손에 잡고 좋아한다. 그러는 사이 한 조약돌을 손에 놓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순간 내 맘이 또다시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다. 아, 이 작은 조약돌의 역사.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르는, 그러면서도 파도에 쓸리고 밀리면서 여기 이 바닷가까지 온 조약돌. 처음 그것은 얼마나한 크기의 돌이었을까? 그것이 얼마나 물결에 부대꼈으면 이렇게 작은 조약돌이 되어 있을까? 그 조약돌에는 그것이 가지고 있지 않은, 멀리 사라져 간 역사가 있다. 읽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조약돌을 갈고 닦은 역사. 아, 이 조약돌 하나가 일러주는 위대하고 거룩한 닦임의 역사를 상상하게 한다. 그래서 내 맘에 와 닿는 소리. 아, 이렇게 여기에 와 있구나. 그것을 보면서 다른 어떤 말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양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낀다. 손바닥 안에 든 조약돌과 역사와 인생이 이상스럽게 겹쳐서 내 맘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되기까지 참고 견디고 함께 해야 했던 기나긴 세월. 거기에는 좋고 나쁨도 없고, 기쁘고 슬픔도 없으며, 밝고 어둠이 사라지고, 강고하고 부드러움이 없는 그냥 동그스름한 조약돌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스친 온갖 것들은 내 상상과 느낌의 세계에만 있을 뿐이다.

우리 삶을 이끄는 하나의 문화도 이러한 것이지 않을까? 우리 역사는 굉장히 긴 세월을 갈고 닦이는 역사였다. 어느 것 하나도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도 한 쪽 주장이나 이끎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도 없다. 어느 권력도 혼자서 몇 백 몇 천 년을 이끌어나간 적도 없다. 어느 것도 오래도록 혼자서 선하거나 거룩한 적도 없었지만 또 악하고 더럽기만 한 적도 없었다. 어느 순간 선하다는 것이 나타나서 악하다는 것을 밀어붙이다가도 그것이 어느 순간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변하여 또 다른 것에 의하여 밀려나고 밀려났다. 모든 권력은 한계가 있었고, 새로운 권력은 언제나 그 지난 권력의 흔적을 청소하기에 바빴다. 그 때 나오는 온갖 쓰레기들 속에서 가장 많이 더러운 것으로 냄새를 풍기면서 나타난 것이 무엇이었던가? 부정과 부패. 부당한 권력행사.

4ㆍ19혁명 때도 온갖 권력자와 재산가들이 줄줄이 부정과 부패의 연결고리에 엮여 있었다. 그 뒤 5ㆍ16군사정변. 그 때도 가장 크게 울린 소리는 부정과 부패를 없애겠다는 소리였다. 그러다가 얼마 가지 않아 그놈들도 역시 썩기는 마찬가지구나 하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몇 번 정권이 바뀌고, 소위 권력의 핵심에 앉았던 사람들이 바뀔 때마다 부정과 부패, 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대한 것들이 마치 연례행사처럼 연속되었다. 뇌물과 착취로 나타나는 없어지지 않는 부정과 부패. 왜 그럴까? 쓸려나가지 않는 쓰레기, 뽑아지지 않는 뿌리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유전인자인가? 관행이요 일상생활이며 문화인가?

지금 정부도 다른 어느 정부와 마찬가지로 부정과 부패를 고치겠다고 나섰다. 몇 달 그렇게 하여 과거 정부에서 일어났던 것들을 파헤치는 작업을 하는 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벌써 지루하단다. 물론 날마다 새롭지도 않은 듯이 터져 나오는 참신하지 못한 뉴스를 듣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다. 이제 그만 덮어두자는 맘들을 나타내기도 한다. 너희는 별 것이겠냐는 맘도 나타낸다. 물론 이 정부 이 정권이라고 하여 산뜻하고 깔끔하게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도 상당히 오랜 기간 그런 문화의 공기를 마시고 살았기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유전인자와 같은 부정과 부패, 부당한 권력행사의 문화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 문화를 바꾸기 위하여는 한 순간, 한 정권으로 될 수는 없다. 그들 자신에 대한 칼끝임을 언제나 간직하고 일을 해야 한다.

지금 정부가 하는 부정과 부패에 대한 조사와 심판은 하나의 상징행위에 불과하다. 그들이 깨끗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고쳐야 한다는 역사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떠난 다음에는 또 다른 명령수행자들이 나타나서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어리석지 않다면 조심스럽게 갈 것이다. 그런 발걸음이 오래 지속되다보면 깔끔한 삶의 문화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씨로 뿌려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는 부정과 부패, 또는 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대한 조사는 항상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려면 역시 권력구조의 변혁과 일반 사람들의 교육과 수련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작은 지금 체제에서 부정과 부패의 고리로 갈 수 있었던 것들을 찾고, 그 제도를 바꾸고, 사람들을 교정하는, 문화혁명과 인간혁명의 길로 가는 길을 닦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참의 문화, 참의 삶을 만들자는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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