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 이어서)신약성경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를 가엽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 중에 ‘가엾게’라는 말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ιξομαι)로 애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은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다, 측은히 여기다, 마음속에서 움직이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한 과부의 고통에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가엽게 여기는 마음으로 공감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삶의 유일한 희망이자, 전부였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잃은 과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실과 아픔에 지금 비통하게 울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 길을 가시던 예수님은 그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과부의 슬픔에 창자가 뒤틀리는 것 같은 비통함과 연민으로 공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울고 있는 과부와 함께 울어 주신 것입니다. 바로 과부의 슬픔에 스플랑크니조마이 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예수의 이 선언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스플랑크니조마이를 선포한 것입니다. 절망과 고통으로 울고 있는 인간역사 한복판으로 사람의 몸으로 직접 오셔서 우리와 함께 울어주신 사건이 바로 베들레험 말구유에 오신 아기예수 탄생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하나님의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아파서 울고 있는 사람들의 자리가 바로 세상의 중심이자, 하나님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곳임을 선언한 놀라운 역전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몸의 중심은 어디일까요? 생각을 좌우하는 뇌가 우리 몸의 중심인가요? 아니면 피가 돌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니 심장이 몸의 중심일까요? 우리 몸의 중심은 심장도, 머리도 아닌 아픈 곳이 몸의 중심입니다.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별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던 새끼발가락도 그 끝에 작은 가시 하나만 박혀도 온 신경이 그곳으로 모이게 됩니다. 아무리 무신경하려고 해도 생각은 아픈 곳으로 집중되게 되지요. 이렇게 아픔이 있는 곳, 그래서 마음이 모이는 곳, 그곳이 바로 몸의 중심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중심도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는 자리가 세상의 중심입니다.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해 직장을 잃은 자리, 재개발로 인해 그동안 살던 보금자리에서 쫓겨난 세입자들의 자리, 가난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과 흩어져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는 노숙인의 자리, 외로움과 가난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텨내는 가난한 독거노인의 자리, 입시지옥에 마음 둘 곳이 없어 방황하는 학교 밖 청소년의 자리 등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는 자리가 바로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는 자리는 하나님의 모든 관심이 집중된 자리요, 하나님이 스플랑크니조마이 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벧엘은 이웃의 아픔에 스플랑크니조마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일어나는 이웃의 모든 아픔에 스플랑크니조마이 하며 함께 울어주어야 하는 것이 바로 벧엘의집이 사람다움의 세상을 열기 위해 서 있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지금보다 더 깊이 공감하고, 더 몸과 마음을 낮춰 우는 사람의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 이하의 자리, 베들레헴 마구간 여물통으로 내려오신 것처럼 벧엘의집은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의 자리로 주저하지 말고 내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샬롬. (다음회에 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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