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자선교회이사장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잘 났거나 못 났거나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니까 인재가 중요하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우리의 수고가 결국 헛되다”라고 고백한 지 3000년이 됐지만 지금도 똑같다.(전 3:10-11)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가 보다.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만들어가야 한다(溫故創新). 과거를 정확히 알되, 거기에 매이지 말고 미래로 세계로 전진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옛 것에 대한 청산(어떤 이는 적폐청산·어떤 이는 정치 보복이라 한다)에 매여 미래로의 진도가 지체되고 있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27년간의 옥고를 겪었지만 복수 대신 화해를 택하여 국민화해·국론 통합으로 세계에 감동을 주고 있다. 그만큼 틀이 큰 지도자요, 역사를 아는 위인이었다. 그는 반복해 '우리가 바라볼 곳은 미래입니다(We look to the future.)'를 외쳤다. 수동적·반응적 입장이 아니라 능동적·주도적으로 살았다. 마치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詩 'I am the master of my fate·I am the captain of my soul'(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다)을 생각게 한다.

중국에서 촉한(蜀漢)의 제갈 량(諸葛 亮)을 보자. 그는 미래를 볼 줄 알면서 실리 추구에도 뛰어났기에 지금도 존경받고 있다. 중국에는 제갈 량의 사당(武侯祠)이 천 개 이상 있다. 중국 사천성 성도에 있는 무후사의 제갈 량 상 앞에는 그가 발명했던 쇠북(鐵鼓)이 있다. 전쟁 때엔 독전고로 썼고 평상시엔 밥 짓는 솥으로 썼으며 잠잘 때는 베개 대용품으로 썼는데 이 쇠북을 베고 자면 멀리서 달려오는 적군의 말발굽 소리까지 감지 가능해 일석삼조의 이기(利器)라 한다. 또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무를 제갈채(諸葛菜)라 한다. 제갈 량은 전쟁터에 주둔할 때 늘 주변 공터에 무를 심게 했다. 무는 ①식량의 대용이 되고 ②싹이 나자마자 바로 날 것으로 먹을 수 있으며 ③솎아 먹을수록 잘 자라고 ④오래될 수록 잘 번식하며 ⑤이동 시에 두고 가도 아깝지 않고 ⑥겨울에도 잘 자라며 ⑦다른 채소에 비해 요리법이 다양한 7가지 장점이 있다.

또 제갈 량이 남방을 정벌하면서 남만의 추장 맹획을 7번 사로잡았다가 7번 놓아주었다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고사와 관련해 남부 지방 쿤밍(昆明) 등지에서는 부엌칼(食刀)을 제갈도(諸葛刀)라 부른다. 이는 제갈 량이 남만을 점령한 후, 몰수한 적군의 무기들을 녹여서 부엌칼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준 데서 생긴 말이다. 칠종칠금의 고사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없으면 취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적으로 하여금 강한 힘에 굴복하기보다는 ‘마음’으로부터 승복을 하게 만드는 전략이 바로 칠종칠금의 전략이며 이 전략은 후세까지 두고두고 감동적인 전략으로 불리고 있다. 돈이나 위력으로 사람을 부리기보다 속마음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복종케 해 충성심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제갈 량의 탁월한 전략이었다.

제갈 량이 승상으로 있던 촉한의 수도인 성도를 금관성(錦官城)이라 부르는 것도 제갈 량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두시언해(杜詩諺解) 중에 나오는 ‘무후사(武侯祠)’란 詩에 ‘승상의 사랑을 어디 가서 찾으리오. 금관성 밖의 잣나무가 울창한 곳이로다’란 구절에 나오는 그 ‘금관성’은 바로 성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금관성이란 도시 별명이 생긴 것은 제갈 량이 승상으로 재직할 때 촉나라 백성들에게 뽕나무를 심게 해 양잠을 하고 그것으로 비단을 짜는 것을 장려했기에 사천성 일대가 중국 굴지의 비단 생산지가 됐다. 제갈 량 덕분에 생산된 비단은 뒤에 서양까지 전해졌고 그 비단의 운반길이 바로 실크로드(Silk road)가 된 것이다.

더불어 제갈 량의 아내 황 씨 부인은 제갈 량이 청년 시절에 살았던 형주 지방의 유력자 황승언의 딸이었다. 황승언은 형주 태수 유표의 동서였다. 황승언의 딸은 얼굴이 검고 누런 머리의 추녀였기에 결혼이 어려웠는데 뜻밖에도 제갈 량이 그를 아내로 택했다. 이로써 제갈 량은 일약객지인 형주 지방의 명사가 됐고 수경 선생의 추천을 받아 유비에게 채용된 것이다. 제갈 량의 부인은 천재였기에 제갈 량의 지혜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촉도(蜀道)의 군수품 운반법인 목우유마(木牛流馬)도 황 씨 부인의 아이디어였다. 제갈 량의 상징처럼 들고 다녔던 우선(羽扇·깃털부채)의 깃 사이엔 부인의 조언이 새겨져 있었다. 이처럼 외모를 보지 않은 제갈 량의 아내 선택은 그의 미래까지 보장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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