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윤 배재대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어부사’로 유명한 굴원은 기울어가는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백가쟁명의 시대를 살았던 시인이다. 후대인들은 그를 주변의 참언으로 끝내 왕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 멱라수에 투신한 불운의 시인으로 기억하는데, 사마천은 “마치 혼탁한 세상에서 빠져나온 듯 티끌 하나 묻히지 않고 살아간 사람”이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사마천이 말한 굴원의 모습은 어부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어부는 초췌한 얼굴에 몸이 바짝 마르고 여윈 굴원에게 추방당한 이유를 묻는다. 이에 굴원은 “온 세상이 다 흐린데 나만 홀로 맑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서” 쫓겨났다고 대답한다. 이를 들은 어부는 “성인은 사물에 얽히거나 막히지 않고, 세상과 더불어서[與世] 변해 옮겨가야 한다[推移]”며 굴원과는 상반된 생각을 제시한다. 《후한서》, ‘최식열전’에서도 “성인은 어떤 일에도 구애받지 않고 세상의 변천을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은 융통성이 없이 마음으로만 괴로워하며 변천에 적응하지 못해서 현실에서 벗어난 말과 글로 나라를 망치기도 한다”며 ‘어부사’의 내용을 빌려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는 자세를 말하고 있다. 어부와 최식의 ‘여세추이(與世推移)’적 태도는 비타협적 처세관을 보여주는 굴원과는 다른 주장이다. 혼탁한 세상의 흐름을 넘어서 현대 우리에게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여 세상의 이치에 맞게 살아가야만 한다는 의미로 확장하여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지식하다’는 ‘곧이식(識)하다’는 어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은 ‘자유분방, 융통성’과 대립되며, ‘우직하다, 보수적’이란 말과는 비슷한 부류로 분류할 수도 있다. 고지식을 무조건 나쁜 뜻의 부정적인 어휘라고 할 수는 없지만, 4차 산업시대를 운운하는 현 시점에서는 거의 사어(死語)나 다름없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시대는 다변화하고 인간이 예측하는 것들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는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엔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변화에 민감하고 주저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 중에 하나라고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이해하고 그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현대가 원하는 인재의 판단 기준도 변화에 대한 대처능력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불장군식의 고지식한 마음가짐에서 벗어나 변화에 순응할 줄 알아야 한다. 합리적 원칙을 바탕으로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융통성도 필요하다. 우직하게 원칙을 견지하며 정도(正道)를 따르고 불의(不義)를 멀리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이와 더불어 유연한 사고로 변화의 흐름을 따라갈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굴원의 말처럼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갓을 털고,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갓이나 옷을 털지 않을 수도 있고, 그것들을 반드시 더러운 사물이라 단정하여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지내는 것이 낫겠다는 극단적인 고지식함을 표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아가 청결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냐는 굴원의 융통성 없는 반문은 굳이 부연할 필요도 없겠다.

'즐겨야 이긴다'의 저자 앤드류 매튜스는 “모든 변화는 저항을 받는다. 특히 시작할 때는 더욱 그렇다”라고 말했다. 무엇이든지 처음이 어렵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화해야 개선할 수 있고, 개선해야 발전할 수 있다. 세상이 변해야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변해야 세상도 변하는 것이다. 내가 변화에 따라가는 객체가 아니라 변화를 이끄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어부가 마지막으로 웃으며 노래한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을 것이라.”는 말처럼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금은 굴원보다 어부의 말을 더욱 귀담아야 할 시대이고, 아직 변화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남았음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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