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대 명예교수

임이 나를 앗기시매 나도 임을 공경터니 
은혜를 못다 갑고 나망(羅網)의 걸녓도다 
언제나 인간의 어즈러운 말리 젹어

임은 철종을 말한다. 임이 나를 아끼고 나도 임을 공경했는데 은혜를 다 갚지 못하고 그만 그믈(‘그물’의 옛말)에 걸렸도다. 언제나 인간의 어지러운 말이 적어…. 종장 끝 소절이 생략돼 있어 의미가 좀 불분명하다.

그믈은 세도가 안동 김씨 일족을 말한다. 이 시조는 그 그믈에 걸린 것을 한탄한다는 내용이다. 이세보의 작품들은 종장 4째 소절이 생략돼 있어 작품의 시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시조를 창으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조창은 넷째 소절을 생략하고 불러 그가 시조창에 익숙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음률의 명칭과 악기, 기생·악사·가객들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어 그가 풍류를 즐겼고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860년 29세 때 이세보는 안동 김씨들의 횡포를 비난했다가 탄핵을 받아 전라도 신지도로 귀양을 갔다. 3년 동안 위리안치(圍籬安置) 됐는데 거기에서 77수의 시조를 남겼다. 그때 썼던 작품이다. 그는 1863년 척신들의 압력으로 사사하라는 왕명이 내려져 서울로 압송되던 중 철종이 승하하는 바람에 죽음을 면했다.

이세보는 선조의 9대손이며 철종의 사촌 아우다. 1857년 동지사은정사(冬至謝恩正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으며 신지도 유배 후 1865년 다시 벼슬에 나아가 형조·공조 참판, 한성부 한윤 판의금 부사 등을 지냈다.

앗갑다 대명뎐지(大明天地) 션우(單于) 땅이 되단 말가
표연(飄然)헌 의관문물(衣冠文物) 치발(薙髮) 위쥬(僞主) 무삼 일고
언제나, 셩진(腥塵)을 쓰라치고 셩대태평(聖代太平)

1857년 26세 때 동지사은정사로서 청나라에 갔을 때 지은 시조다. 이때 청나라는 아편전쟁 후유증과 태평천국의 난 속에 빠져 있었다. 외교사절의 우두머리이면서 청의 전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200여년 전 망한 명의 회복을 바라고 있었으니 그가 청에 대한 현실 인식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시조의 주제는 현실 비판, 유배, 애정, 기행 등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주제는 다른 시조 작가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그의 시조의 독특한 모습이다.

져 백셩의 거동 보쇼 지고 싯고 드러와셔
한 셤 쌀를 밧치랴면 두 셤 쌀리 부됵(不足)이라
약간 농사 지엿슨들 그 무엇슬 먹자 하리

저 백성 거동 보소. 쌀 한 섬 바치려면 두섬 쌀이 부족하다. 약간 농사를 지었는데 그 무엇을 먹자고 그리 하는가. 농사를 마친 뒤에 세금으로 쌀 한 섬을 바치려면 이런 저런 명목의 세금들이 붙어 두 섬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게 된 백성들의 사정을 고발했다. 현실 비판 의식은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그의 강직한 성품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세도정치의 폐단을 철종에게 고발하고 정의로운 정치와 사회의 조성에 진력했다. 또 정치가 면모 못지않게 시인으로서 459수라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시조집 ‘풍아(風雅)’ 역시 가장 많은 작품을 수록한 개인 시조집이기도 하다. 그가 64세이던 1895년 8월 20일 민비가 곤령전에서 피살되는 변을 당하자 통곡하다 병이 들어 같은 해 11월 23일 졸했다.

신지도에는 명사십리(鳴沙十里)가 있다. 유배시절 밤이면 해변에 나가 북녘 하늘을 보며 유배의 설움과 울분을 시로 읊었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후 비바람이 치는 날이면 이 모래밭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다 하여 명사십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수천수만 사람의 인생에 대한 대답은 수천수만 가지일 것이다. 공통점은 인생이란 별 것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남을 것만 남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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