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직 을지대 교목

 

살다보면 세상이 온통 불의하고 부패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람들은 서로 헐뜯고 싸우며 상대의 약점을 노리는 이리떼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세상이 부패하고 사람들이 모두 악한 것 같아도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이들을 가리켜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 이라 말한다. 법으로 규정하지 않아도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갈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일수록 법이 있어야 한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기에 법이 보호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경쟁은 불가피하고 갈등과 다툼은 어쩔 수 없다. 이 때문에 서로간의 규칙과 약속이 필요하고 순서도 필요하다. 만일 이 규칙과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사회 혼란과 무질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래서 법이 필요하다. 법은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공동체 질서의 가장 기초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어서다.

법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규정해 보호하고 또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한다. 그래서 법이 있기 전에 반드시 우선돼야 할 게 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이들의 양심과 도덕이다. 사회 질서를 위해선 개인의 양심에 호소를 하고 도덕과 규범에 의지하며 바른 전통과 관습, 건강한 문화가 뒷받침돼야 한다. 이것이 전제될 때 법은 사회를 지탱하는 기준과 버팀목이 된다.

그렇다면 법으로 많은 걸 규정한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아니면 최소한의 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대부분 최소한의 법으로 규정된 사회를 좋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민주국가를 지탱하는 법률의 구성 원칙은 그 반대다. 실제로 법을 계속해서 만들고 법률 조항은 계속해서 늘어날 수밖에 없다. 법으로 인간의 삶을 모두 보호하거나 일일이 제한할 수 없는 게 당연한 것임에도 법률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다. 

대부분의 현대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죄형법정주의’ 때문이다. 죄형법정주의는 “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없고 법률 없이는 형벌도 없다”는 말에 기초해 처벌보다 보호를 우선으로 한다. 범죄와 형벌을 미리 법률로 규정해야 한다는 근대 형법상의 기본원칙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라 할지라도 법률로 이를 규정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 아무리 국가권력이라 해도 규정되지 않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를 일일이 법으로 제한하고 규정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한 사회의 성숙한 시민의식과 윤리의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법은 계속 복잡해지고 늘어날 수밖에 없다. 사고만 터지면 법부터 고치고 문제가 있으면 법을 손질해야 하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에 평화와 안정은 있을 수 없다. 법은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고 개인의 윤리의식과 양심은 법을 뛰어 넘어야만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

대형 재난이 반복되고 있다. 제천 화재 발생 한 달 만에 밀양의 한 병원에서 대형화재가 일어났다. 언론은 “법도 없었고, 법도 지키지 않은 총체적 부실이 만들어낸 화재참사”라고 말한다. 대형 사건이 터지면 언제나 그렇듯 정치권의 네 탓 공방이 이어지고 문제와 원인을 지적하는 말만 소란스럽다. 원인과 대책은 내놓겠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는 사람은 없다.

미국의 생물학자였던 윌리엄 클라크는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말한 야망은 돈이나 출세, 명성을 뜻하는 세속적 야망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됨을 위한 야망이다. 세속적 야망은 경쟁의 승리와 성공적 성취를 통해 채워지지만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간됨을 위한 야망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것만을 목표로 삼는다. 여기엔 경쟁과 성공 대신 관용과 사랑이 있다.

법으로 제한하기보다 신뢰와 양심이 사회를 지탱하는 참된 기초다. 원칙과 신뢰를 깨는 게 그 어떤 것보다 두려운 사회문화가 조성돼야 한다. 불법을 저지르는 것에 부끄러움을 알고 법보다 양심이 우선되며 규칙과 규제는 서로의 약속만으로 충분한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환상이라도 이런 사회가 그립다. 이제 그만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