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회에 이어서)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기 위해 역사의 한복판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은 우는 사람과 함께 울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하나님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곳임을 선포하여 공의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부자들, 권세가들이 세상의 중심은 자신들이 있는 곳이고, 자신들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오만과 독선에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하나님의 관심은 가진 사람들이 아닌 지금 가진 것이 없어 고통당하고, 억울함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들의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을 선언하시며 하나님 자신이 우는 사람들의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는 사람들의 고통에 스플랑크니조마이 하신 하나님의 공감에 오늘 벧엘의집은 함께 공명해야 합니다. 비를 맞는 이에게 우산을 받쳐주려고 애쓰기보다는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함께 비를 맞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주저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들을 해내더라도 그 자체가 이미 우리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고, 벧엘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벧엘의집이 창립고백과 정체성을 완전하게 지켜나가는 길은 우리의 이웃의 아픔에 철저하게 스플랑크니조마이 하는 것입니다.

벧엘의집이 우는 사람들의 아픔에 스플랑크니조마이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흔들림 없이 실천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선교는 전통적으로 ‘세상 → 교회 → 하나님’이라는 도식을 전제로 교회는 우월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하나님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여 교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보다는 우월한 자리에 있다는 선민의식이 강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도식을 ‘교회 → 세상 → 하나님’이라는 관계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창조한 것은 세상이었지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사용될 때만 하나님의 그릇과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직접 역사의 현장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섬기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교회는 세상위에 군림하는 자리가 아닌 세상을 섬기는 자리,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들이는 것보다는 그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그리스도가 있게 하는 것이 선교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그리스도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밖에 있는 소외되고 고난 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자리는 옥에 갇히고, 헐벗고, 굶주리고, 외롭고, 나그네 된 사람들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벧엘의집의 자리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일하고 계신 세상을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경험과 생각, 지성을 내려놓고 주님이 부어주시는 지혜의 영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가 아니라 “주님은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헤아리면서 공동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흠결을 보려고 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애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벧엘가족 여러분! 우리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된 곳, 세상의 중심인 우는 사람과 함께 울다보면 너무 힘들어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때론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함께 연대하여 올곧 하게 간다면 분명 주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주저하지 맙시다. 힘차게 올 한 해, 우는 사람들과 스플랑크니조마이 하는 벧엘이 되도록 합시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샬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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