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최근에 나는 ‘평화’라는 말을 많이 생각한다. 통일이라는 말보다도 그것이 더 근본이라고 본다. 통일이란 말 속에는 일종의 뜨거운 감정이 들어 있지만, 평화는 일상의 냉정하지만 따뜻한 삶의 자세다. 요사이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과 북이 소통하고, 공동선수팀을 꾸리고, 함께 입장하고, 남북의 중요한 정치가들이 만나서 이야기하고 식사하고 함께 관람하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

물론 흥분되고 크게 환영하고 기뻐할 일임에는 틀림없다. 올림픽경기가 끝나고 상황이 달라지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은 의미가 깊은 일이라고 본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든지, 다른 무엇 때문에 중단되든지 그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언제나 그런 일들은 바닷가의 잔파도가 출렁이듯이 지속되고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환영하고 기뻐할 일이지만, 금방 무엇이 일어날 것같은 고조된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스포츠행사를 통한 정치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행위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정치상징행위 속에는 실제가 항상 함께 따른다. 거짓 행위 속에 진실이 들어 있고, 진정이 자라듯이.

개인들 사이나 집단이나 나라들 사이에서도 평화롭게 살기 위하여는 몇 가지 전제들이 깊은 철학으로 몸과 생활에 배어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선한데 너는 악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결코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느 강력한 힘에 의하여 눌려서 조용히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평화상태라고 보지 않는다. 평화는 매우 역동적이면서 각자 자기 생명력을 제대로 발휘하되 조화로운 삶의 상태를 말한다. 서로 관여하지만 간섭하지 않고, 교섭하지만 종속되지 않으며, 앞뒤가 있고 높고 낮음이 있지만 비교대상은 아니다. 자기를 최대한으로 발동하되 남을 방해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국제 정치무대를 보면 참으로 한심하리만큼 수준이 얕은 갈등과 전쟁상황을 가져오는 언행이 너무 많다. 자기가 힘이 세고 잘났다고 뻐겨대는 못난이들의 힘자랑 무대처럼 보인다. 나는 이 자리에서 함석헌 선생의 두 말을 인용하고 싶다.

전두환 군부독재에 의하여 강제로 폐간되는 마지막 호 《씨알의 소리》에 씨알에게 보내는 이런 말이 있다. “여러분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이야 한이 없지만, 그것을 다한다면 재미도 있겠지만, 이제 우리는 재미 같은 것을 바랄 수가 없고 사는데, 하나의 역사적인 민족으로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아니 될 참말은 뭐냐 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을 하려면 욕심이 없어지지 않고는 안 됩니다.

내 나라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적이라는 저 나라를 위해서도 싸웁니다. 의는 내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저 나라에도 있습니다.” 대개 의로움이나 선함은 내 속에는 있는 데 저들 속에는 없다는 착각 속에서 살 때가 많다. 개인은 그것을 극복하는 수가 참으로 많지만, 국가나 민족 또는 어떤 특정 종교집단에 들어가면 무조건 나만의 것이 옳고 다른 것은 그르다는 독단에 빠지는 수가 많다. 이것이 평화를 깨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나는 남이 없어서는 안 되는 공존하는 존재다. 그래서 다시 함석헌은 ‘너ㆍ나’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너 아니곤 나 없으니 나란 네 속 들었는 듯
나 아니곤 너 없으니 너란 내 속 들었는 듯
둘인가 또 하나인가 한도 둘도 없다네

인류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에는 언제나 너 나가 엄밀한 의미에서 구별되지 않는다. 한 생명이요 한 인류라는 전체만이 근본을 이룬다. 밥 딜런이 노래하고, 존 레논이 노래한 것처럼 국경이나 이념이나 종교나 정파라는 것은 인간의 역사과정에서 만들어진 임시조직에 불과하다. 인류가 언젠가 성숙된 단계에 가면 그것들은 전혀 다른 삶의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다.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조금 멀리 넓게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또 다른 현실이 그것이다.

물론 북한이 가진 핵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세계의 다른 모든 핵을 가진 나라들에서도 핵을 없애는 운동을 진지하게 벌여야 정당하다. 그것들은 매우 장기간에 걸친 인류의 대형 프로젝트라야 할 것이다. 핵무기를 개발하고 가지는 것은 재앙을 스스로 만드는 일이지만, 그것을 축복으로 바꾸는 것도 인류가 해야 한다. 모두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믿어주는 새로운 철학과 종교와 정치행위가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어느 것을 하면 이것을 한다는 지나친 조건행위가 아니라, ‘그러하더라도’ 정당한 이것은 해야 한다는 유연성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몇 일 전 어느 모임에서 내가 만일 하나의 선물이라면 누구에게 무슨 선물이면 좋을까 하는 말을 나눌 때가 있었다. 나는 러시아의 인형 마트료시카가 되어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게 주어지면 좋겠다고 했다. 그것은 좀 변형된, 활동하는 인형이다. 인형에는 트럼프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겉의 것을 열면 또 그의 얼굴이 나왔다가 살짝 ‘깍꿍’ 하면서 김정은의 얼굴로 바뀌었다가 다시 그의 얼굴로 돌아간다.

또 하나 속의 것을 열면 또 그의 얼굴이 나왔다가 ‘까꿍’ 하면서 푸틴이 되었다가, 또 다른 것을 열면 시진핑이 되었다가, 또 다른 것을 열면 문재인이 되었다가 다시 그의 얼굴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나라는 얼굴 속에 적대관계나 상대하는 다른 이의 얼굴이 들어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선물이다. 서로 모두가 하나라는 말이다. 실패하고 속더라도 ‘사람 속에 숨어 있는 선한 힘을 발동시킬 수 있는 넓은 도량과 믿어주는 마음’을 서로 가진다면 평화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을까? 망상이라고? 좋은 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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