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진 한남대 총동창회장, 전 대신고 교장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시험이나 승진, 혹은 정해놓은 성취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실패를 맛보기도 한다. 또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대인관계에서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회·경제적 문제에서 수많은 좌절도 겪는다. 이런 실패나 어려움, 좌절이 때로는 자신을 단련하는 약이 되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로 돌변하기도 한다. IMF 사태 이후 우리 사회의 범죄가 평년에 비해 더욱 많이 발생했다는 보도자료를 보면 실패·어려움·좌절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보단 분노로 바뀌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는 경우가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2015년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상해나 폭행 등 폭력범죄 37만 2000건 가운데 41.3%는 분노가 동기가 됐다고 한다. 즉 화가 나서 다른 사람을 해친다는 얘기다. 또 지난해 도로 위에서 분노범죄를 저지른 보복운전자가 2168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분노범죄가 많이 나타나는 건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그만큼 힘들고 어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민원 창구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민원인들에게 전화는 물론 대면으로도 수없이 시달린다. 공기업 상담창구에서 근무하던 한 직원은 “자신이 이 돈을 왜 내야 하냐며 일주일 내내 찾아와 욕설을 하고 위협한 사례가 가장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민원인에게 강하게 대응하다간 감사원이나 국민신문고에 수없이 고발당하는 바람에 업무량이 몇 배로 늘어나 일단 참는 것이 상책이란다.

분노로 인해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경우도 있다. 경북 경산에서 술에 취해 귀가하던 조 모(52) 씨는 편의점에 들러 숙취해소음료 3병을 구입한 뒤 봉투에 담아주지 않는다고 아르바이트생과 실랑이를 벌였다. 이에 점원이 경찰에 업무방해로 신고한다고 하자 분노가 폭발해 아르바이트생을 찔러 숨지게 했다. 경남 양산의 한 아파트에선 외벽 도색 작업을 하던 인부가 음악을 틀어놓자 그 소리가 크다며 주민 서 모(41) 씨가 작업을 위해 옥상에 걸어놓은 밧줄을 홧김에 잘라버렸다. 그래서 밧줄을 타고 작업하던 김 모(46) 씨가 추락해 사망했다. 충북 충주의 권 모(55) 씨는 인터넷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서비스 신청을 한 뒤 집을 방문한 통신업체 수리기사에게 흉기를 휘둘러 무참히 살해했다.

이같이 현실에 대한 불만을 참지 못하고, 분노로 홧김에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빈번하다. 가해자들은 모두 우리의 이웃들이다. 평범해 보이는 주민이나 손님, 길가는 행인이 ‘욱’ 하는 순간 범죄를 저지르는 건 더 이상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소시민들이 자신의 뜻이 좌절되자 분노를 품고 상대방을 가해한 것이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이 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건네주는 따뜻한 손길이나 상대방에게서 듣는 격려와 위로의 말은 큰 힘이 돼 재기를 꿈꾸게 만든다. 그러나 냉대와 비난은 격한 감정을 드러내거나 극한 행동을 일으키게 한다. 미국 예일대 심리학자들이 고안한 ‘좌절-공격 이론’에 의하면 목표가 거듭 좌절되고 현실의 벽에 자주 부딪히면 사람들의 심리가 공격적으로 변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가 좌절되거나 실패했을 때 그로 인해 유발된 공격이 자신의 내부로 향하면 자기 학대나 우울증이 되고, 외부로 향할 때는 당사자나 또는 자기 앞에 있는 대화 상대에 대해 공격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표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우리 주변에서 실패와 좌절을 맛보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부축해 줘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이런 부분이 많이 부족했다. 짧은 기간 경제성장을 이루다보니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제 것을 지키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이 살아왔다. 그러기에 승자독식의 사회구조가 실패한 사람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다. 이제는 눈을 돌려 성숙한 사회의 시민으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서로 돕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제는 분노가 가라앉고 평화가 깃드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꿈꾸는 이런 세상이 선진사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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