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국보 되는 논산 은진미륵 이야기
[스토리텔링] 국보 되는 논산 은진미륵 이야기
  • 이기준
  • 승인 2018.02.13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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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한 노파가 야산에서 나물을 캐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노파가 울음소리를 쫓아 가 보니 그곳에서 큰 바위가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이 기이한 이야기는 왕에게 보고됐다. 신하들은 무슨 징조인지 토론을 하게 됐고 급기야 ‘이 바위로 석불을 조성하라’는 계시로 받아들였다. 왕은 곧바로 나라의 큰 스님에게 불상을 세우게 했다. 이 일은 500년 고려왕조의 기틀을 세운 광종(재위 949∼975년) 때의 일로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 옆 관촉사사적비(조선 영조 17년(1743년))에 새겨진 것이다. 은진미륵으로 더 잘 알려진 석조미륵보살입상의 탄생 설화다. 문화재청은 지난 1963년 보물 제218호로 지정한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고 13일 밝혔다.

 

 

#1. 거대한 돌덩어리 어떻게 쌓아 올렸을까

은진미륵은 높이 18.21m, 폭이 9.9m에 이르는 거대 석조불상이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석조불상 중에선 가장 크다. 잘 들여다보면 불상은 세 덩어리의 화강암을 층층이 쌓아 만든 것이다. 이 화강암은 지금의 논산 연산지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통나무를 굴려 돌을 가져오는 데만도 수 년이 걸렸으리라.

그런데 더 큰 의문이 생긴다. 거중기 같은 장비가 없던 시절, 어떻게 이 거대한 돌덩어리를 쌓아 올렸을까? 은진미륵 앞에 있는 극락전 벽을 보면 답을 알 수 있다. 극락전엔 4개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은진미륵 조성 과정을 묘사한 그림이다. 혜명대사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동자스님들이 냇가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 놀이에서 답을 얻었다고 한다. 돌 하나를 세워놓고 돌 위와 주변을 흙으로 덮은 뒤 다른 돌을 그 위로 끌어올리는 방식이었다.

은진미륵을 정면에서 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위엄이 느껴진다. 옛 백제시대의 불상과는 사뭇 다르다. 백제 왕조는 민초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기 위해 온화하고 친근한 석불을 남겼다면 고려 때는 정치적 노림수가 더해져 부처를 통해 왕의 존엄함을 구현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삼국시대 최고였던 백제 장인의 정신과 손기술이 어디 가겠는가. 삼성각에 올라 은진미륵의 측면을 보면 왠지 친근함과 자비로움이 배어나온다. 아래에서 고개를 들어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물론 근엄함도 자꾸 보면 친근해진다.

 

 

은진미륵에 대한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은진미륵 보관 부분을 보면 한 쪽 귀퉁이가 봉합된 흔적이 남아 있다.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이어 붙인 것인데 이와 관련한 것이다. 고려 때 거란이 고려 침입을 위해 압록강 앞에 서게 됐을 때다. 적장이 어디로 건널까 고민하던 찰나에 삿갓을 쓴 스님이 냇가를 건너듯 다리만 걷어 올린 채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적장은 그곳을 지목하며 강을 건너라 명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강을 건너던 많은 병사가 그 곳에서 수몰됐다. 화가 난 적장은 스님을 잡아다 목을 벴는데 그 자리엔 삿갓만 베인 채 떨어졌다. 은진미륵이 스님으로 화신해 국난을 막은 것이었다는 전설이다. 당시 은진미륵은 국난이 닥치자 땀을 흘렸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지만 민간에서 은진미륵은 내세에 올 구원의 부처이자 호국의 부처로 여겨지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2. 석등과 석탑, 그리고 석문

은진미륵과 만나려면 예전엔 ‘解脫門(해탈문)’이라고 쓰인 석문(명곡루 옆길)을 지나야 했다. 이 석문은 다른 사찰에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문이다. 은진미륵 축조 이후 너무 많은 참배객이 몰리자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석문을 축조하고 돌담을 쌓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석문의 높이가 너무 낮다. 허리를 굽혀야 지날 수 있다. 자연히 허리와 고개를 숙이고 석문을 지나오면 은진미륵의 웅장함이 배가된다. 경외심을 가지라는 거다.

 

 

이 곳에선 은진미륵만큼이나 석등(보물 제232호)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다음으로 큰 규모다. 은진미륵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은진미륵에 참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을까. 이 행렬은 밤까지 이어졌을 것이고 그래서 더 크게 불을 밝혀야 했을 것이다. 석등 앞엔 4층 석탑(원래는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됨)이 있고 그 앞에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배례석(도지정유형문화재 제53호)이 놓여있다.

현재의 대명광전이 건립되기 전엔 미륵전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관촉사에선 은진미륵, 석등, 석탑, 미륵전이 일렬로 배열돼 있다. 그런데 미륵전엔 불상이 없다. 은진미륵이 불상을 대신한다. 극락전 북벽이 유리로 돼 있어 은진미륵을 보면서 예불을 올릴 수 있다.

 

#3. 숨겨진 이야기들

관촉사를 구석구석 둘러보면 또 다른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우선 은진미륵과 비슷한 높이에 산신과 칠성신, 독성신을 함께 모신 삼성각(三聖閣)이 있다. 뿌리 깊은 토속신앙과의 조화를 위한 불교가 배려다. 명곡루 아래엔 이승만 전 대통령 추모비도 있다. 논산 연무대엔 포로수용소가 있었는데 이 전 대통령은 전쟁 포로들이 남한에 정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이 그 고마움을 추모비에 담아 세웠다. 관촉사라는 사찰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은진미륵이 완성된 이후 중국 승려 지안(智眼)이 은진미륵에서 비친 빛을 쫓아와 예배했는데 그 빛이 촛불 같다고 해서 절 이름을 관촉사라 했다.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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