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용 대전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

 

‘아버지’와 ‘어머니’ 이 말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아려온다.
얼마 전 결혼식장을 다녀왔다. 신랑이 부모님께 큰 절을 올렸다. 요즘 식장에서 가끔씩 보는 모습이다. 그런데 신랑이 절을 올리고 한 동안 일어나지 않아 하객 모두 의아했다. 일어나는 신랑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중에 그 사연을 듣고 보니 신랑의 심정이 이해갔다. 신랑의 아버님은 시한부 삶으로서 아들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병원에서 외출을 해 그 날 혼주 자리에 앉은 것이고 신랑은 젊었을 때 방황 등으로 아버지에 대한 죄송스러움과 이제는 당당한 아들이 될 수 있는데, 곧 가족과 헤어질 아버지께 어떻게 해드릴 수 없다는 본인의 한 때문에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그 사연은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고교시절 아버님을 마중 나갈때 마침 비가 많이 내려서 처음으로 아버님을 등에 업었을 때 아버지의 몸이 처음으로 가볍다고 느꼈을 때의 심정은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자식이 신체적으로 클 때 우리 부모님들은 그만큼 작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님께 얼마나 효를 했을까? 아니 살면서 얼마나 걱정을 끼쳐드렸을까? 자식 걱정으로 우리 부모님은 웃음보다는 걱정이 더 많았을 것이다. 지금도 자식 때문에 일어나서부터 잠자리에 드시기까지 부모님은 당신보다는 자식을 더 생각한다. 예부터 불효에는 많은 것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불효는 단 한 가지라고 본다. 바로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효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왜 효로 가는 길은 멀고 힘들까? 

그 답은 필자를 비롯한 여러분 모두 답을 알고 있다. 우리의 부모님은 평생을 자식을 위해 희생하시며 길러주셨는데 지금은 기력이 노쇠하셔서 자식들에게 더 해주시고 싶은신데도 더해주시지 못하는 심정을 자식 누가 알겠나! 어린 자식이 잘못하면 상대방 부모님이 당신보다 어리더라도 고개를 숙이며 자식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고 자식이 잘 된다면 그 공은 모두 자식에게 돌리는 우리 부모님. 자식들의 어리광을 들어주며 타이르고 격려해주며 항상 자식의 편에 서서 응원해주시는 부모님. 하지만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는 사랑의 매로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시는 부모님. 이런 부모님의 마음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오늘날 자식들은 학업과 사회생활로 인해 일찍이 부모님과 공간적 거리를 두고 있다. 이 공간적 거리가 점차 사고적 거리로 변한다. 부모님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는 사람으로만 인식돼 결국은 오늘날의 불효만연의 사회적 병폐가 생긴 것이다. 노인 학대의 가해자 가운데 42%가 '아들'이라는 놀라운 조사 결과가 그 단적인 예이다. 아들이 이런데 며느리나 딸은 오죽할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지금 우리사회의 실상이다. 이런 실상을 시급히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우리 세대의 이런 문제는 아래 세대들에 의해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 명약관화하다.

내가 부모에게 효를 하면 그것을 보고 배운 나의 자식들도 분명 나에게 효를 다할 것이다. 효는 실천이다. 아무리 좋은 교재나 말들보다도 실천이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 부모님은 우리 자식에게 큰 것을 바라지 않는다. 부모님들은 자식이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부모님께 고급차나 집을 드리는 경제적 선물보다는 자식들이 당신들을 자주 찾아오고 대화하며 함께 웃을 때 더 기뻐하신다. 이런 행동들은 나중에 우리 자녀들에게 안부 전화를 받고 마음이 담긴 따뜻한 말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여러분들에게 효는 만행의 근본이요, 사람의 도리라는 도덕적인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 라는 말이 있다. 자식은 공양하고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평소에 효도를 다 못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후회하는 자식이 되지 말자라는 간절한 부탁을 드리고 싶다.

오늘부터 부모님께 정성어린 편지를 쓰고 함께 산책을 나가보자. 그리고 우리 자식들이 부모님의 친구가 돼보자. 그것이 작지만 부모님께 행하는 작은 효가 될 것이고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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