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신 한남대 사학과 명예교수

 

◆ 태조 왕건의 호족정책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고려사회를 신라의 연장이 아니라 보다 발전적인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우선 그는 신라의 골품제를 없앰으로써 정치 참여층을 확대시켰다. 그러나 통일 이후에도 각지에 호족세력이 건재했기 때문에 이에 왕건은 호족과의 관계를 잘 풀어나가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첫째,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는 사성(賜姓)정책을 시행했다.

둘째, 각지의 강력한 호족을 딸들을 비(妃)로 맞이하는 결혼정책을 실시해 무려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에게서 아들 25명, 딸 9명이나 두게 됐다.

셋째, 향리의 자제를 서울에 두고 출신지의 일에 대해 자문역할을 담당하게 한 후 일정 기일이 지나면 관직을 주는 기인제도를 실시했다.

넷째, 경순왕 김부(金傅)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아 1000년 수도 경주민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그들의 반발을 막고자 했다. 그는 이같은 정책으로 지방세력을 무마시키고 고려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이념적 기반으로 민족 동질성의 회복을 추구했다.

◆ 태조 왕건의 낙타 굶기기
고려왕조 초기엔 후백제 신라 주민들과의 갈등, 분열이 치유되지 못하고 있었다. 또 후삼국 통일에 앞장섰던 장수들과 호족들은 전승(?勝)의 과실을 두고 서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힘겨루기가 진행됐고 북방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고 해 거란을 적대시한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평소 왕건의 인품과는 맞지않게 거란 사신과 낙타에게 가혹한 행동을 한 모습이 보인다.

“거란이 사신을 파견해 낙타 50필을 선사했다. 왕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심히 무도한 일이다. 드디어 외교관계를 단절해 사신 30명을 섬에 유배시키고 낙타를 만부교 아래에 매두어 모두 굶어죽게 했다.” - ‘고려사’ 권2, 태조 25년 10월

왕건은 발해를 우리 민족으로 인정해 발해 신라를 계승한 유일한 나라로서 고려의 정통성을 과시하려고 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단일 민족체, 단일국가였다고 하나 이는 고려 이전에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고려 이전엔 남북국이, 그 이전에는 삼국으로 분리돼 있었던 상황에서 왕건 때 처음으로 통일된 나라를 이뤘다. 그러나 발해의 영토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으며 후백제도 강압적으로 통합했던 만큼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분열될 가능성이 있었다. 국내의 분쟁보다는 북방의 적국, 즉 거란의 대처가 시급함을 강조하기 위해 경각심을 일으키고자 낙타를 굶겨죽였던 거다.

◆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불교와 북진정책을 강조했다. 그는 불교를 통해 40여 년간 분열돼 있던 주민들을 정신적으로 통합시키고자 했으며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발해유민을 우대하고 평양을 중시해 같은 민족의 나라임을 강조한다.

왕건의 노력으로 고려는 하나가 됐다. 이제 전쟁을 통해 물리적으로 통합한 성과를 넘어 정신적으로 고려라는 구심체를 중심으로 하나의 국가의식, 민족의식이 성립되고 있었다. 고려후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지만 주민의 호응을 받지 못해 바로 실패한 점에서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요컨대 왕건의 정책이 기본바탕이 돼 근대에 이르기까지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국가로 내려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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