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6년 홍주성전투에서 전사한 홍주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홍주의사총 봉분 앞으로 홍성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그들의 운명을 바꿔놓은 건 이 고을 홍주(洪州)였다. 위국충절(爲國忠節)의 상징이 된 고려의 명장 최영(1316~1388년),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음에 이른 사육신 성삼문(1418~1456년), 임란(壬亂) 때 의병을 일으켜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이광륜(1546~1592년). 이들 모두 홍주 땅이 길러낸 충신으로 그 절의(節義)가 홍주 산하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

홍주의병을 이끈 김복한, 이설 등 유학자들은 인간과 동식물의 본성이 다르다는 남당 한원진(1682~1751년)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따르며 척사론을 견지했고 이는 끈질긴 항일 의병활동의 사상적·정신적 무기가 됐다.

그들은 결코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홍주성을 둘러싸고 바싹 죄어오는 일본군은 통감 이등박문이 파견한 조선주차군(임시주둔군)이었다. 전투경험이 많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정규군 보병 2개중대(400명), 기병 반개소대, 전주수비대 1개소대는 홍주의병을 압도하는 화력으로 1906년 5월 31일 새벽 2시 30분경 총공격에 나서 5시간 만에 홍주성을 점령한다.

당시 의병 수는 1000여 명으로 전사자 60명, 포로 127명이라고 일본군은 보고했으나 희생된 의병들은 80여 명에서 많게는 1000여 명까지 자료마다 상이하다. 충남대 김상기 교수(국사학과)는 최근 발간된 내포문화총서12(내포의 한말의병과 독립운동)에서 “홍주성전투 직후 부임한 홍성군수 윤시영의 일기에 따르면 일본군은 성 점령 후에도 의병을 형틀에 매달고 총살했다. 일본군의 보고서는 신빙할 근거가 없다”며 “의병의 중심에 있던 유병장 유준근의 ‘마도일기’에는 300여 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밝혔다.

그래서일까. 이때 순국한 홍주병오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홍주의사총(홍성군 홍성읍 대교리)의 봉분은 크고 높았다. 사방 9.5m, 높이 3m 크기 무덤에 수백 홍주의병들의 부서진 몸이 합장돼 있다. 사당인 창의사(彰義祠)에 900의사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구백의총’이라고 불리다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변경됐다. 지난 23일 찾아간 의사총은 위엄하면서 엄숙했다. 4만㎡ 면적에 분묘와 창의사, 창의문, 진충문 등이 정갈하게 들어서 있다.

입구를 지나 창의문(倡義文) 일곱계단을 오르면 바로 묘역을 마주한다. 누런 잔디 떼가 봉분을 포근하게 감싸고 아래엔 둘레석을 쳤다. 좌우로 망주석이 섰고 묘 오른쪽에 정인보가 짓고 심상직이 쓴 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丙午殉亂義兵將士公墓碑)가 봉분을 지키고 있다.

1949년 7월 건립된 묘비에는 “의병으로 죽은 이의 시신은 언덕만치나 쌓여 이튿날 이를 가져다 골짜기의 구덩이에 매장하였다. 당시 왜적의 기세가 더욱 치열하여 근방 사람들도 잡혀 시체더미만 늘어나 길이 막힘을 볼 수 있었다. 시신이 자기 집에 보내진 자는 거의 없었다. 지금도 그 날이 되면 성곽 안팎으로 기제를 지내는 밤의 곡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온다”고 쓰여 있다.

진충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묘역 뒤편으로 ‘홍주의병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산화한 홍주의병의 넋을 기리고자 홍주성과 성을 감싸는 홍성천, 월계천을 조형화하고 원(하늘), 사각형(땅), 삼각형(사람)을 형상화했다. 2013년 2월 준공됐다. 홍주의병을 상징하는 인물상들은 총칼을 든 채 태극기를 바라보고 있다. 홍주의사총은 1973년 충남도기념물 4호로 지정됐고 2001년에 국가지정사적 431호로 이름을 올렸다. 매년 5월 30일 제향(祭享)을 지낸다.

글·사진 내포=문승현 기자 bear@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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