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독립의 꿈으로 하나돼 외쳐
만세운동 충청 전역 확산 전초

◆3월 16일, 그날의 기억
나라 잃은 설움에 산 지 9년. 도대체 내가 왜 일본 놈들 앞에 머리를 굽신대며 살아야하는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 한숨에 이젠 지쳐만 간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어느 날 문득 옆집 가게에서 경성 소식을 듣기 전까진 그랬다. 경성에서 만세시위가 한창이란다. 규모도 크고 그 열기도 대단해서 일본 놈들도 감히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한다는 얘기였다. ‘아, 드디어 나라를 되찾는가 보구나. 부디 이번만큼은 꼭 이 속박을 걷어차 버리리.’라는 다짐이 절로 굳어져만 갔다.

그 소식을 들은 지 보름은 됐을까. 드디어 우리 동네에도 그 열기가 불어와 사흘 전 남부교회 앞에서 기습적인 만세시위가 있었다는 얘기가 아침부터 파다하게 퍼졌다. 너도나도 ‘이제 우리도 뭘 해야 하는 거 아니여?’, ‘가만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겄어, 안 그려?’하는 맞장구가 한창이었다. 정오가 됐는지도 모른 채 상인들끼리 한참을 떠들던 그 때였다. 가게로 한 청년이 뛰어 들어와 “저희도 경성의 우리 동포들과 뜻을 함께 합시다. 밖으로 나와함께 해주세요.”라고 숨을 헐떡이더니 태극기를 나눠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소란스러운 바깥 소리에 사람들과 밖으로 나가니 장터 한쪽 가마니 더미 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우리도 외칩시다. 힘을 하나로 모읍시다, 여러분! 대한독립만세”라며 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그 소리에 태극기를 전해주던 청년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 나온 상인들도, 장날 찬거리를 사러 나온 이들은 누구랄것도 없이 연이어 만세를 외치며 함께 걸었다. 뭐라도 끌린 듯 자연스레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자주독립’의 꿈으로 하나가 됐다.

◆충청의 독립정신 된 ‘인동 만세운동’
1919년 3월 16일 대전 동구 인동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은 4월 1일까지 계속됐다. 전국으로 만세 시위가 확산하자 일제는 병력이동을 단행, 공주와 대전에 보병 중대를 증파하는 등 무력 진압을 계속했다.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종교계와 학생들이 그 중심을 이뤘던 것에 반해 인동 만세운동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국권회복의 외침이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그 확산의 가능성이 가장 큰 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나 경제적 침탈에 고통 받던 상인과 농민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한 것만 놓고 봐도 그렇다.

3월 16일과 27일, 4월 1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인동 만세운동은 그 날 “조선은 독립되어 전국 각처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는 이때 유독 대전만이 빠지고 있음은 큰 치욕”이라던 한 청년의 외침처럼 자주 독립국의 꿈을 민중에 각인시켰고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만세 행렬이 충청 전역으로 확산하는 전초가 됐다.

조그만 장터에서의 만세운동 치고 독립을 염원했던 대가는 참혹했다. 일제의 가혹한 총칼 앞에 30여 명이 순국하고 수십 명이 체포돼 옥고를 겪었다. 그럼에도 일제는 독립을 염원하는 민중의 염원을 쉽게 꺾을 수 없었다.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우리 후손들은 구속과 속박 없는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게 하고 말겠다는 단호하고도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손에 들린 태극기와 독립신문, 그리고 독립선언문은 그런 의지의 상징이었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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