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홍주성 탈환, 日 간담 서늘케

홍주의병을 이끈 지산(志山) 김복한 선생. 국가보훈처 제공.

홍주의병은 충청도 홍주(洪州) 일대 유생과 민중들이 연합한 대규모 항일무장투쟁조직이었다. 김복한, 이설, 안병찬, 민종식 등 오늘날 홍성과 인근 지역 유림들의 지도 아래 1895~1896년과 1906년 2차례에 걸쳐 봉기해 한때 일본군으로부터 홍주성을 탈환하는 등 도드라진 전과(戰果)를 올리며 일본을 긴장케 했다. 

홍주성전투에서 학살에 가까운 일본 정규군의 진압작전으로 수백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며 무너졌지만 홍주의병은 이후 광복회 설립과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19년 김복한은 의병장이자 호서유림의 대표로 한국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99주년 3·1절을 앞두고 123년 전 분연히 일어선 홍주의병을 다시 기려본다. 홍주의병을 지휘한 여러 의사(義士)들의 격문(檄文)이나 통문(通文) 등에서 문장 일부를 발췌해 글에 반영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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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거라. 너희가 안온한 삶을 버리고 의(義)를 택하였기로 죽음을 무릅쓰니 그 기상이 갸륵하다. ‘나는 대대로 녹을 받은 신하의 후손으로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평소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김복한)’ 기억하느냐. 을미년(1895년) 이 나라 국모가 ‘여우사냥’이라는 왜적의 참람한 책동 아래 무참히 시해되고 잇달아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의 가르침을 단발령으로 하루아침에 잘라내려 하니 왜놈들의 패악이 극에 달하였도다.

을사년(1905년)의 참담함은 어떠하냐. 제순(외부대신), 지용(내부대신), 근택(군부대신), 완용(학부대신), 중현(농상부대신) 등 오적에 의해 강제로 맺어진 늑약으로 ‘왜놈들에게 대권이 옮겨졌으니 천장의 상소와 백장의 공문서를 올린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는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왜놈 하나라도 죽이고 죽는 것만 못하다.(안병찬)’ 내 조석(朝夕)으로 분개하여 ‘충신의 갑옷을 입고 인의의 창을 잡아 적신의 머리를 베어 저자에 걸어서 조금이라도 신인(臣人)의 분함(안병찬)’을 씻고자 홍주의진(洪州義陣)을 일으키니 ‘사방의 충의 선비를 불러들여 원수인 왜놈들을 물리치고 왕실의 흥복(興復)을 도모(김복한)’할 것이다.

너희 의로운 장정들은 다시 듣거라. 병오년(1906년) 5월 31일 오늘, 나와 너희의 피가 내를 이루고 뼈와 살은 흩어져 버려질 것이다. 들리느냐. 간악한 저들의 총포가 서로 부딪는구나. 보이느냐. 적들이 강고한 대오를 이뤄 몰려오는구나. 너희가 불과 구식화포 2문을 내세워 홍주성을 포위공격하고 마침내 왜군으로부터 성을 탈환하니 하늘을 찌르는 그 기세가 왜는 두려웠을 터. 오죽하면 통감 이등박문이 조선주차군(임시주둔군) 파견을 명령해 보병에 날랜 기병까지 합세토록 하였겠느냐. 홍주성을 수복한 19일부터 수차례 도발을 일삼은 적들의 경찰대와 헌병대까지 물리친 너희의 용맹함이 든든하다.

아! 오늘날의 화를 누가 불렀는가. 찬연한 종묘사직은 어찌하여 바람 앞 등불처럼 위태로우며 신민(臣民)은 관직과 기름진 땅을 버리고 어여쁜 아낙과 아들딸을 뒤로 한 채 집을 나서 총과 도검을 들어야 했느냐. ‘적신들이 안에서 화를 만들어 나라를 들어다 남에게 준 것이니 동방의 피 끓는 남자로서, 누가 그놈들의 살을 씹어서 한을 씻고자 아니하겠는가.’(안병찬)

군사장과 참모장, 유격장, 좌·우군장, 돌격장에게 명하노라. 대포와 소총, 창과 환도를 정비하고 맡은 바 위치에서 적을 맞으라. ‘남아가 여기서 머리와 귀를 베일지언정 어찌 왜적에 굴복하랴.(성재한)’ 너희 ‘여러 군자들의 정의가 더욱 밝아져 해나 별이 오랠수록 몹시 빛나게 되는 것과 같이(정인보)’ 훗날 너희 1000명의 후손들은 너희의 무덤을 높이 쌓아 올려 절하며 묘혈에 아름다운 꽃을 바칠 것이다. 홍주의 의병들아 목숨으로 홍주성을 지켜라. 구국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려라.

내포=문승현 기자 bear@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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