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은 상당히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남겨 준 잔치였다. 잔치는 시끌벅적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중에 어떤 알맹이들을 찾아 나가는 함께 살아가는 한 과정이다. 어떤 경기종목에서 누가 더 잘하고 그렇지 않은가를 판가름하는 것은 그냥 함께 큰 잔치를 벌이는 매개물이다. 그것을 상징으로 하여 다른 알맹이를 찾아보자는 것이 잔치다. 그냥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달리고 넘어지고 다치고 기뻐하고 웃고 우는 것이 잔치하는 속뜻이 아니다. 그것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오랜 동안 요란을 떨고, 그 많은 돈을 들이고, 자연을 파괴하고, 사람들의 맘을 뒤집어놓으면서 준비하고 진행할 필요가 없다. 그런 행위를 통하여 무엇인가 굉장한 부대소득 같은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잔치는 바로 이 부대소득이란 것이 진짜 소득일는지 모른다.

이번 경기에서 굉장히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또 보는 이들이 직접 경기하는 선수들과 하나가 되어 참여하고 응원한 것은 컬링이라는 종목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있었던 쇼트트랙의 이어달리기도 마찬가지로 짜릿하고 감동스러운 것이었다.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순간, 어렵겠다 느낀 위기를 깜짝할 순간에 해결하는 그 묘기에 감탄하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것은 경기 시간이 짧고 승부를 겨루는 것이 오래 되지 않아서 함께 맘을 나누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이 길지가 않았다. 그 대신 컬링은 하나하나 경기를 할 때마다 보는 사람들에게 맘을 졸이게 하였고, 경기장에서 소란스러웠던 것처럼 중계를 보는 사람들도 긴장과 소란함을 함께 느끼게 했었다. 이겨도 져도 다 함께 만족스러워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번 컬링경기였던 것을 느낀다.

처음에는 저것도 얼음 위에서 하는 경기일까 할 만큼 별로 운동같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경기를 보는 때마다 느끼는 것은 단순히 어느 한 사람의 탁월한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굉장히 정확한 느낌과 기술과 집중력을 가지고 돌을 구르게 하는 것이지만, 빠르고 느리며 돌고 바로 가는 그 돌을 경기자들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데 얼마나 많은 묘한 기교가 있는 것인가? 던지는 한 사람의 능력에, 그 돌이 바라는 곳에 정확히 도착하도록 하기 위한 동료들의 길닦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던지고 길닦고 기다리고 또 길닦고 기다리고 하는 과정을 짧은 시간 안에 다 이룬다. 그렇게 던지기 전에 어떻게 던질까를 서로 간단히 상의한다. 그 때 어느 한 사람의 주장이 계속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느낌과 예감과 판단을 나눌 때, 순간 내 판단과 느낌을 접고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신뢰의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미끄러져가는 돌이 던지는 사람의 손을 떠난 순간부터 마지막 점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지시와 순종과 자기판단에 따른 또 다른 행동들이 이어졌다.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이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이어진다. 물론 국가대표가 되어 경기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굉장한 연습과정이 그냥 연습이 아니라 실제 경기하듯이 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서로가 맘을 알고 기술을 알고 버릇을 알아차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다가도 일단 심각한 경기가 시작되면 이겨야 한다는 다급한 맘에 평상심이 깨지는 것은 일상이다. 그런데 이번 컬링 선수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실패에 대한 깊은 자책을 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냥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그 다음 것을 위하여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기장 안에서 하나되어 각 선수들이 각자 자신이 가진 책임을 다하는 모습에서, 보는 모든 사람들의 맘도 평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큰 아쉬움은 정치권에 있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한 것은 전전 정권에서 했다. 전 정권은 준비하고, 현 정권은 그것이 싫든 좋든 잘 치러야 한다. 잔치는 언제나 그것을 통하여 가장 심각한 문제를 푸는 역할을 할 때 의미가 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남북문제요 북미문제이면서 여야간의 정치의 화평한 진전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 정부가 북한 선수들이 참여할 수 있게 노력한 것과 그것을 계기로 이른바 고위급 인사들이 오고간 것은 잘 했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북미간의 대화의 낌새라도 겉으로라도 보였으면 더 좋았을 것이고, 여야간에 이 문제들에 대하여 좀 더 통이 큰 자세로 나갔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야당은 자기들이 이런 상황에서 정권을 잡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맘으로 했다면 서로가 함께할 수 있는 잔치가 되지 않았을까? 내가 보기에 지금 서로 다툼을 일삼는 정치가들의 수준은 시대의 흐름과 멀고, 시민들의 기대에 아주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시민은 어리석은 바보가 아니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맘과 행동을 아주 잘 파악하는 탁월한 지혜와 눈을 가지고 있다. 그 지혜와 눈은 컬링 선수들처럼 제 위치를 떠나서 서로 믿어주는 맘으로, 솔직히 제 깊은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진지하고 열린 맘으로 이야기하고 일을 함께 꾸려나가는 길은 없을까를 살핀다. 시간이 가면 분명히 북미간에도 대화가 될 것이고, 남북간에도 더 깊은 화해의 길이 열릴 것이고, 여야의 정치지형도 바뀔 것이다. 그렇게 돌고 도는 세상살이에 너무 좁은 이기심으로 삶을 살지 않으면 좋겠다. 내가 속한 파당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살이의 열린 양심에 충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컬링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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