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聯合)

각기 다른 생김새 어우러져
쓰임새 제각각 살아가네

틀리다 생각하면 수용할 수 없고
연합 또한 할 수가 없네

쓰임새 틀려도 다름을 인정하면
다름이 합력하여 각기 다른 지체(肢體) 되네

손과 발 달라도
연합하는 지체 되네

틀림이 아니기에
각기 다른 지체 되네

이해를 가로막는 편견의 족쇄
사랑의 능력만이 벗겨낼 수가 있네

편견의 틀 속에 부글부글 끓는 갈등
사랑으로 바라보면 다름이 보이네

다름을 인정하고 연합하는 지체들
각기 다른 그들이 연합하여 하나 되네

 

생물체는 무생물과 달리 형태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분화된 여러 부분으로 돼 있고, 부분 상호 사이 및 부분과 전체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전체로서 하나로 정비된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유기체(有機體)는 그러한 유기적 구성을 갖는 것을 의미하고, 좁은 의미로는 생물을 의미한다. 또 넓은 의미로는 사회를 유기체로 보기도 하고, 우주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시각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라는 말 속에 담긴 유기체의 본질을 잘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곧 ‘자생’, ‘자율’, ‘자유’의 의미로 연결된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모든 생명체가 스스로 살려고 애쓰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의 원리를 ‘자유’로 파악했다. 인간은 관계라는 망을 통해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는, 사회라는 조직체에 속해 있다. 인간의 몸이 각기 다른 지체들의 유기적 기능을 통해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성경은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말할지라도,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은 아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라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이 어디냐? 하나님은 원하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었으니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다. 그러므로 눈이 손더러 ‘너는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너는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약해 보이는 몸의 지체가 더 요긴하고, 부족한 지체가 더욱 귀한 일을 하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사회라는 유기체를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해 우리는 차이과 차별이 주는 영향력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차별(差別)은 등급을 가르는 것(Discrimination)을 의미하고, 차이(差異)는 성질 또는 종류를 구분하는 것(Classification)을 의미한다. 남자와 여자는 차이의 대상이지 차별의 대상은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는 다양성이 어우러져 하나된 사회이지만,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고 ?편견이나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해? 차별하는 사회는 분열과 혼란만을 초래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만 그에 따른 나의 일과 타인의 일에 대한 역할 분담이 가능해진다. 모든 것이 합력시켜 선(善)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다양한 지체들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움으로써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즐기도록 우리의 몸을 창조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닌 수용해야만 하는, 사랑의 대상임을 자각하는 사회는 성숙한 사회다. “삶은 관계다. 삶은 교환이다. 그리고 세계는 관계의 그물이다. 세계는 관계로 직조돼 있다. 이 관계의 그물을 쉽게 끊을 수 있다고 여겨왔던 인류의 값싼 지혜는, 결국 우리 시대의 모든 전쟁과 기아, 환경 문제의 원인이 되고 만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이다. 차별은 최고만을 지향하는 인간의 몰지각이 만들어낸 죄의 산물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때 최상의 것이 주어져 최고가 되는 것인데, 최선이 아닌 차별을 통해 최고가 되려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을 부추기는 사탄의 전략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는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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