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대전민주의거 당시 대전고등학교 재직 중이었던 조남호 선생님을 만나다

▲ 지난 3일 대전고등학교를 찾은 조남희 선생님의 손과 기념비 사진. 사진= 정재인 기자
▲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이 1960년 3월 8일 상공장려관(대전 중앙네거리) 앞길에서 경찰에 의해 집단 연행돼 가면서도 ‘학원에 자유를 달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제공=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이 1960년 3월 8일 대흥동과 문창동 일대의 주택가 골목에서 경찰에 쫓기고 있다. 앞에도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이 있고 멀리 반대편에도 진압경찰이 있어 갇혀있다. 제공=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홍영유
▲ 지난 3일 대전고등학교를 찾은 조남호 선생님이 3.8민주의거 기념비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정재인 기자

#1. 지난 3일 대전의 최고기온은 18도. ‘오늘만은 이불 밖으로!’라는 탄복이 나올 정도로 참 따뜻했다. 완연한 봄이 온 것이다. 대전 중구 대흥로에 위치한 대전고등학교에 도착하자 조남호(92)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3‧8대전민주의거 당시 대전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한 역사의 산증인이다. 당시 그는 데모를 위해 교실 창과 담을 넘어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의 보호를 위해 대전 인동까지 동행했다가 경찰로부터 선동자로 몰렸다.

결국 학생들을 대신해 두 손에 차가운 수갑이 채워져 경찰서에 끌려가게 된다. 그는 대전고등학교 운동장 옆에 위치한 ‘3‧8민주의거 기념비’를 바라보며 한 동안 묵념했다. 그는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 걸까? 기념비에는 ‘여기를 거쳐 가는 대능의 젊은이여!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아는 그날의 용기를 되새겨 항상 깨어 있어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2. “그때가 참 좋았죠. 학생들이 다 참 착하고 말을 잘 들었어요.” 한참을 미간의 주름을 깊게 새기던 조 선생님은 그제야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내심 ‘참 착하고 말을 잘 들었다는 학생들이 왜 데모를 일으켰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 말한 ‘착하고 말을 잘 듣는다는 의미’는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닌 불의에 대한 저항과 용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조 선생님에 따르면 1960년 3월 8일 대전고 학생들이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불의, 불법적 인권 유린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공설운동장으로 향했다. 조 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그들의 뒤를 따랐다. 당시 대전고 학생들이 쓴 결의문 내용을 보면 ‘외부세력 학원침투 방지’, ‘교내에서의 선거운동 금지’, ‘서울신문 강제구독 사절’, ‘언론탄압 반대’ 등의 내용이었다.

당시는 대부분의 중·고교에서 2월 중에 졸업식을 했으므로 3월에는 3학년이 없이 1,2학년만 등교했다. 따라서 3월 8일부터 10일까지의 3‧8민주의거는 1,2학년 재학생에 의해 이뤄졌다. 학생들은 대흥동과 문창동 일대의 주택가 골목에서 앞뒤서 곤봉을 휘두르는 진압경찰에 갇히면서도 ‘학원 자유 보장’, ‘언론 자유 보장’을 외쳤다. 

#3.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이 1960년 3월 8일 상공장려관(대전 중앙네거리) 앞길에서 경찰에 의해 집단 연행돼 가면서도 죽어라 자유민주주의 열망을 포효했다. 당시 조 선생님도 학생들과 함께 경찰서로 끌려갔다. 당시 그는 학생들을 따라 도립병원 옆 뚝을 지나 시내로 들어서 인동 옆길까지 도착했다. 거기서도 경찰과 학생들 간의 육박전이 벌어졌는데 돌연 경찰이 조 선생님에게 다가와 수갑을 채웠다. 학생들을 선동한 주동자라는 것이었다. 조 선생님은 “경찰서에 끌려가면서도 수갑을 찬 손이 아프지 않았어. 수갑 차도 떳떳했지 내가 잘못한 일이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4. 당시 같이 경찰서로 끌려갔던 홍성균, 채범석 선생님은 모두 돌아가셨다. 이제 그날의 증언을 전할 분은 조남희 선생님이 유일한 것이다. 그의 손은 주름이 가득했지만 왠지 단단해 보였다. 세월의 기록을 마치 주름에 새긴 듯 말이다. 선생님을 집으로 모시면서 “선생님 손은 큰 의미가 있네요. 학생들의 대신해 수갑을 차기도, 불의에 대항하는 훌륭한 학생들을 일궈내기도 하지 않았나요?”라고 넌지시 여쭸다. 조 선생님은 “3‧8은 민주화의 도화선이지. 내가 평소에 가르친 것을 학생들이 정의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이 폭발한 거야. 오늘날 우리 민주화에 기여를 했다면 그 정도겠지”라고 묵직하게 답했다. 

정재인 기자 jji@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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