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이사장)

 

옛날 어른들이 봄은 여인의 계절, 가을은 남성의 계절이라 했다. 봄바람에 여인은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가을 낙엽에 남성은 가슴에 센티멘탈을 느낀다는 것이다. 어디 그럴까? 이해인 수녀의 ‘봄바람에 날리는 여인의 향기처럼’이란 중편시를 텍스트로 해 봄철 한 여인 수도자의 심상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봄이 오면 나는 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봄앓이를 하고 싶다/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꽃나무와 함께 나도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봄이 오면 나는 햇볕이 잘 드는 안뜰에 작은 꽃밭을 일구어 꽃씨를 뿌리고 싶다/손에 쥐면 금방 날아갈 듯한 가벼운 꽃씨들을 조심스레 다루면서 흙냄새 가득한 꽃밭에 고운 마음으로 고운 꽃씨를 뿌리고 싶다/봄이 오면 나는 매일 새소리를 듣고 싶다 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봄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새들의 이야기를 해독해서 밝고 맑은 시를 쓰는 새의 시인이 되고 싶다/바쁘고 힘든 삶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봄이 오면 조금은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게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봄이 오면 나는 이슬비를 맞고 싶다 어릴 적에 항상 우산을 함께 쓰고 다니던 소꿉동무들 불러내어 나란히 봄비를 맞으며 봄비 같은 이야기를 속삭이고 싶다/꽃과 나무에 생기를 더해주고 아기의 미소처럼 사랑스럽게 내 마음에 내리는 봄비, 누가 내게 봄에 낳은 여자 아이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면 서슴없이 '봄비' '단비'라고 하고 싶다/봄이 오면 나는 풀 향기 가득한 잔디밭에서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동요를 부르며 흰 구름과 나비를 바라보는 아이가 되고 싶다/함께 산나물을 캐러 다니던 동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고, 친하면서도 가끔은 꽃샘바람 같은 질투의 눈길을 보내오던 소녀시절의 친구들도 보고 싶다/봄이 오면 나는 우체국에 가서 새 우표를 사고 답장을 미루어 둔 친구에게 다만 몇 줄이라도 진달래 빛 사연을 적어 보내고 싶다/봄이 오면 나는 모양이 예쁜 바구니를 모으고 싶다/내가 좋아하는 솔방울, 도토리, 조가비, 리본, 읽다가 만 책, 바구니에 담을 꽃과 사탕과 부활달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선물들을 정성껏 준비하며 바쁘고도 기쁜 새봄을 맞고 싶다/사계절이 다 좋지만 봄에는 꽃들이 너무 많아 어지럼증이 나고 마음이 모아지지 않아 봄은 힘들다고 말했던 나도/이젠 갈수록 봄이 좋아지고 나이를 먹어도 첫사랑에 눈뜬 소녀처럼 가슴이 설렌다/봄이 오면 나는 물방울무늬의 옆치마를 입고 싶다/유리창을 맑게 닦아 하늘과 나무가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먼지를 털어낸 나의 창가엔 내가 좋아하는 화가가 그린 꽃밭, 구름 연못을 걸어 두고, 구석진 자리 한곳에는 앙증스런 꽃삽도 한 개 걸어 두었다가 꽃밭을 손질할 때 들고 나가야겠다/조그만 꽃삽을 들고 꽃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름다운 음성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나는 멀리 봄나들이를 떠나지 않고서도 행복한 꽃 마음의 여인, 부드럽고 따뜻한 봄 마음의 여인이 돼 있을 것이다.”

春來不似春(봄은 왔으나 봄 같지가 않다)이라고 어설퍼하지만 옛날선비들은 흰 벽 위에다 81송이의 흰 매화(九九消寒圖)를 그려놓고 동짓날부터 시작해 하루 한 송이씩 붉은색을 칠해 넣었다 그리하여 81일이 지난 후 창문을 열어젖히면 실제 매화꽃이 피어 향기를 날렸다고 한다. 이토록 봄을 그리워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새해, 새 학교, 새 학년, 새로운 결혼, 새로운 직장. 모든 것이 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하여 새로운 인품이 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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