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우 공주대 교수

 

지난 1995년 장 코르미에가 ‘체 게바라 평전’을 출판한 뒤로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에 번역, 소개된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한 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아마 2005년이었을 것이다. 아들의 책장에서 이 책을 처음 보았다. 당시 고교 3년생이었던 아들에게 이 책을 어떻게 해서 읽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선생님이 써 주신 자기소개서 내용 중에 이 책을 읽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체 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으며, 17세에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전공하였다. 대학시절과 그 이후 오토바이를 타고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등 중남미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다. 과테말라에서는 제국주의를 배격하고 반독재·반부패를 지향하는 아루벤스 정부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감명을 받아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아루벤스 정부는 전복되고 그가 예찬했던 과테말라 혁명이 좌절되고 만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그는 ‘무력에 의한 라틴아메리카 혁명’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질병보다 사회·경제적인 불평등과 같은 사회의 질병의 척결에 투신하겠다는 열망을 갖게 됐다.

과테말라에서 멕시코로 망명한 뒤인 1955년에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게 되었다.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의 공산혁명에 획기적인 공을 세웠으며, 쿠바 혁명정부 개혁정책의 핵심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카스트로와 노선의 갈등을 느끼게 되자 1965년 쿠바를 떠났다. 아프리카 콩고의 내전에 참전한 뒤에 볼리비아로 가서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으나 1967년 라이게라에서 정부군에 생포·사살되었다. 체 게바라는 혁명의 아이콘으로 각광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꿈과 열망에 비해서 39년의 세월은 참으로 짧은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가 그토록 도움을 주고자 했던 가난한 농민들의 협조를 받은 정부군에 의해 사살되어 시신마저 거친 황야에 버려지고 말았으니 이보다 더 비극적인 종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2005년에 나는 체 게바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들에게 체 게바라 평전을 더 이상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내 아들이 체 게바라와 같이 험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라는 인물에 대한 포폄의 차원을 떠나서 평범한 부모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일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체 게바라가 선택한 혁명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가 사회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전쟁이었다. “물레방아를 향해 달려드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품고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다.” 이 말은 체 게바라의 명언으로 널리 알려진 것인데, 그가 싸움의 도구로 선택한 창이나 총은 어떤 일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 추궁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평화가 아니고 전쟁을 택했다고 해서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반성보다 타자에 대한 공격을 앞세우게 되기 때문이다. 나를 바꾸지 않고 남에게 바꾸는 것을 강요했을 경우 좋은 결과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적 진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가장 빠르고 올바른 길은 혁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작은 변화에 있으며, 그 변화는 남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체 게바라도 “진정한 혁명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에 의해서 인도된다”고도 하거나 “진정한 혁명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혁명이며, 어떠한 물질적 보상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라고도 했다고 하니 싸움터마다 모습을 드러냈던 그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운명의 한계 같은 것이 작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체 게바라를 평하여 “그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했다는 말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르트르를 만날 수 있다면 꼭 물어봐야겠다. 왜 그렇게 생각했으며,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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