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역사가 어떻게 지어지고 어디로 흘러가게 될 것인지 미리 아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저렇게 되면 좋겠다고 바랄 수도 있고, 이리저리 흘러갈 것이라고 예측할 수는 있지만, 역사는 그렇게 꼭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때때로 그렇게 바라고 예측한 대로 되는 듯이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방향을 바꾸면서 흘러간다. 사람들이나 시대의 어떤 흐름과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그래서 몹시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하게 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한다. 이러할 때 우리는 양재기에 물끓듯이 순간순간의 일들에 울고 웃고 춤추고 또 슬퍼한다. 그런데 조금만 눈을 바로 뜨고, 귀를 쫑긋하여 들으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것을 잠시 숨기고 감출 수 있지만, 오래도록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지도 않고, 또 그것이 햇볕 아래 나타났다고 하여 다 밝혀지고 알려지는 것도 아니다. 숨겨도 숨겨지지 않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들,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바로 그것들의 속알을 알아차리는 것이 우리가 할 일 중 귀한 것이리라.

지금 남북한의 관계,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를 놓고 아주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할 수도, 바랄 수도 없었던 것들이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평창겨울올림픽이라는 것을 계기로 이른바 남북의 고위급들이 왔다갔다 하고, 국가의 책임자들의 편지가 오고가고, 또 미국에게도 그러하고. 그렇게 하여 차근차근히 쌓아도 되지 않던 것들이 봇물 터지듯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남과 북의 정상이 4월에 만나자고 했고, 북과 미의 정상이 5월까지 만나자고 했으며, 모든 것을 다 열어놓고 이야기 하자고 했다. 그렇게 오래도록 그러한 것들을 바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몹시 불안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얼어붙고, 서로 다투는 입장에서 볼 때는 아주 굉장한 사건이 순간에 일어난 것이라서 환상을 가질 만큼 놀라운 것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생명과 평화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놀랄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길로 접어든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국제정치나 국내정치가 온전하고 정상이라면 이런 합의들은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단 말이다. 온 인류가 함께 살기 위하여 노력하게 될 관점에서 보면 그렇단 말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내려온 현실정치에서 보면 아주 놀라운 진전이면서 잘 된 일이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듯이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같은 조급함이나 무조건 잘 될 것이라는 환상스런 반응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그렇게 하자고 합의하고 약속했을 뿐이다. 그것이 실현되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그것을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겨내야 하는 공동의 과제가 이제부터 남아 있다. 그러므로 '마치 유리그릇을 다루듯이' 아주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잘 나가다가 아주 작은 장애물에 스케이트 칼날이 걸려 넘어져 꿈을 잃는 얼음위의 경기처럼 알 수 없는 요인들이 모든 곳에 도사리고 있다. 원래 정치란 것은 미리 예단할 수도 없고, 계산가능한 것이 아닐 때가 많지만, 지금 북과 미의 정치책임자들은 특히 더 예측가능하지 않은 사람들이란 것이 일반의 느낌이다. 물론 그들이야 아주 탁월한 지혜와 기술을 짜서 고도의 전략과 전술을 짤 것이지만, 그 세부사항을 모르는 사람들은 겉만 보고 그렇게 쉽게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단 말이다.

그러나 정치가들의, 외교관계를 잘하는 그들의 웃음과 노여움, 춤과 굳어진 몸자세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도덕성 또는 진정한 속생각이 어떠한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 모든 것들은 고도로 계산된 정치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뒤에 숨겨진 것을 하나하나 다 알 수는 없는 것이지만, 나타난 그것이 곧 전체를 나타내는 진실이라고 보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지금 합의된 것들은 아주 좋고 또 좋다. 우리들은 그것을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진정한 것으로 믿고 밀어주어야 한다.

이렇게 갑자기 이루어진 여기에는 분명한 깨달음이 있다. 모든 사람의 관계, 국제관계는 자연스럽고 평화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경쟁으로 치달리면 서로 피곤하고 불안할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곳에 모든 물질과 정신과 맘과 사람을 소비해야 한다는 창피스런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어디에도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점이다. 더욱이 중요한 깨달음은 평화를 위해서는 아주 진정성 있게, 바보처럼 솔직하게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재인정부가 그 일을 잘 하였다. 그러나 문제해결에는 시기가 있다. 지금 북이나 미는 그 시기를 적절히 잘 선택하였다. 이번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그런 때가 찾아오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모두가 다 평화로운 방법을 찾아야 할 절박한 현실에 부딪쳤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크게 두 가지를 꼭 실현하는 길로 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국의 강력한 제재가 서로 살 길을 새롭게 찾아야 한다는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호간의 강력한 무기와 제재가 영원한 평화체제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시작으로 북한의 비핵화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비핵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어떤 전쟁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대국에 종속되어 있는 체계를 극복하고, 진정한 독립국으로 모든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미국과 친한 것은 좋지만, 그에 종속되는 것은 극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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