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형 청운대 교수

 

홀로 남겨진 귀족의 딸이 있었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우며 그 아름다움을 넘어선 고귀함을 갖추었다. 현명하며 진실하고 절제할 줄 알았다. 요즘으로 치면 1등 신붓감이다. 그녀에게 청혼하기 위한 구혼자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신랑감을 선택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금, 은, 납으로 만든 궤짝을 남겨 두었다. 3개 궤짝 중 하나에 딸의 초상화를 넣고 그 초상화가 있는 궤짝을 선택한 사람과 결혼하라는 것이다. 신랑이 되고픈 사람은 3개 궤짝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데 상자마다 문구가 적혀 있었다. 금궤에는 '선택하면 만인이 원하는 것을 얻으리다', 은궤에는 '선택하면 신분에 응당한 것을 얻으리라', 납궤에는 '선택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고 운명에 걸게 되리라'란 문구다. 셰익스피어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일부다.

신랑감들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3개 궤 중 가장 많이 선택된 것은 금궤다. 거기에는 초상화가 없었다. 대신에 '빛나는 것이 다 금은 아니다. 겉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목숨을 판 사람이 많다. 조금만 더 현명하고 판단력이 영글었더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란 글이 있을 뿐이다. 반짝이는 것을 좇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상의 가치는 돈이라고 믿는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해 있다. 모든 것을 돈과 연관시켜 생각하고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목적 역시 돈을 모으는데 두기도 한다. 소망하는 것을 얻고 싶은 만인의 마음이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삶을 가치 있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돈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금궤 다음으로 많이 선택된 것이 은궤다. 거기에도 초상화는 없었다. '일곱 번 불에 달군 은궤, 판단 또한 일곱 번 단련되어야만 선택에 틀림이 없을 것을. 그림자에 입을 맞추고 그림자 같은 행복만을 얻는 자도 있다. 은으로 겉치레한 바보도 있다'란 글이 있다. 형편에 맞지 않아도 겉만 번드르르하게 꾸미는 경우가 해당된다. 실속도 없이 겉모양만 치중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거나 낭비를 한다. 언변이 화려하거나 말만 앞세우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폼생폼사한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타인과의 경쟁심이나 이기심에 관심이 많다. 인기, 명성, 지위 등에 쉽게 현혹되는 경우가 그 예다. 이들은 작은 권력이라도 잡으면 주인 앞에서 꼬리 치는 강아지처럼 신나하고 인기가 조금만 올라도 황하(黃河)의 하백(河伯) 신(神)과 같은 도도함을 갖는다.

납궤를 선택한 사람은 적었다. 그러나 여기에 초상화가 있었다. 또 '보이는 대로 선택하지 않은 그대는 운 좋았고 선택 또한 옳다. 이 행복 네 것이 되었으니 만족하고 새 것을 찾지 말라'란 글이 있다. 납궤를 선택한 사람과 결혼하라는 것이 아버지 뜻이다. 이것을 선택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 놓는다. 따라서 내 놓아야 할 것은 사람에 따라서 많이 갖고 있거나 적게 갖고 있는 재산이나 지식 같은 것이 아니다. 지위처럼 높거나 낮은 것도 아니며 인기, 명성과 같이 한 순간 많이 갖고 있지만 곧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재산, 지식, 지위, 인기, 명성과 같은 것은 내 놓을만한 대상이 아니다. 많이 갖고 있다면 아까워 내 놓지 못할 것이고 갖고 있지 않다면 내 놓을 것조차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내 놓고 운명에 걸 수 있는 것은 누구나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언제나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만의 특성인 개성이다.

개성은 자기만의 세계이고 운명이다. 반짝이지도 않고 포장도 되어 있지 않다.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언제나 갖고 있지만 발견하기 힘들다.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고 나타내려고 해도 나타나지 않는다. 가장 시시한 것부터 이상하고 고통스럽고 복잡 미묘하다. 따라서 평가하기 어렵다. 개성은 양심이나 평범함, 보편성으로부터 늘 위협을 받는다. 관습의 돌팔매와 비난의 화살을 맞는 경우도 허다하다. 올가미에 가두어 놓기도 한다. 그런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삶의 존재와 개인의 성격에 대한 호기심 어린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 놓고 운명에 실험을 해야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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