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깨야 니러안자 거믄고를 희롱하니
창밧긔셧난 학이 즐겨셔 넘나난다
아해야 나믄술 부어라 흥이 다시 오노매라

술에 취해 있다 다시 깨어나서 거문고를 연주하니 창 밖에 있는 학이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덩실덩실 즐겁게 춤을 추고 있다. 아이야, 남은 술을 부으려무나 흥이 절로 나는구나.
술과 거문고를 즐겼던 당시 사대부인 경화사족(京華士族) 일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김성최(1645~1713 ?)는 거문고를 잘 타는 것으로 유명했다. 경화사족은 일반적으로 번화한 한양과 근교에 거주하는 사대부들로 특히 18세기 한 시대의 조선 사회를 정치적·사상적 측면에서 이끌어 왔던 지배층을 말한다. 또한 지방을 낮추어 부르고 서울을 높여 불렀던 번화한 서울의 사족들을 특별히 지칭하여 부른 말이다. 거문고, 술, 학 같은 소재들은 경화사족들이 일상 속에서 예술적으로 즐겨 향유했던 대상들이다.

공정(公庭)에 이퇴(吏退)하고 할 일 아조 업서
편주(扁舟)에 술을 싯고 시대중(侍中臺) 차자가니
노화(蘆花)에 수(數)만한 갈며기난 제벗인가 하다라

관청의 아전들이 물러가고 할 일이 없어 작은 배에 술을 싣고 시중대를 찾아가니 무성한 갈대꽃에 많은 갈매기들이 내 벗인가 하노라. 일상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곳이 바로 유람의 대상인 유유 한적한 강호 자연이다. 당시는 자연 완상, 경승지 유람 같은 것들이 사대부 일상사에서는 그들만의 중요한 소일거리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유람은 즐기는 것으로 그뿐, 자연과 어떤 대화를 나눈다거나 자연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시중대는 강원도 통천군 흡곡면에 있는 동해안의 한 사구로 관동팔경 중의 하나이다.
김창흡도 시중대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읊었다.

넘실넘실 일렁일렁
호수가 울창한 산속에 감추어져 있으니
그 툭 터져 드러낸 것보다 나은 점이 많다.
누대의 형세는 실로 중추의 달 즐기기 마땅하리라.
배는 삐꺽거리는 듯
사람은 시를 읊는 듯
남북 사이로 왕래하노니
그림이로다, 그림이로다.

-‘시중대중추범월(侍中臺中秋泛月)’

시중대의 유람은 당시 사람들에게 유명해서 정선의 그림으로도 남겨져 있다. 훗날 조유수가 이병연에게 정선의 그림을 청할 때 반드시 시중대를 그려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시중대를 ‘연기 안개 아득하니 마음대로 멋진 배를 띄우고 스스로 강호의 주인이 되어 유람할 수 있는 곳’이라면서 시중대의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김성최는 연시조 14수 ‘율리유곡(栗里遺曲)’으로 유명한 김광욱의 손자이다. 1683년(숙종 9)에 단양군수로 부임, 여러 내외직을 거쳐 정3품 당상관인 목사에까지 올랐다. 3수의 시조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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