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억울한 죽음 밝힌 용감했던 기자

 

[기자와 기레기③] 그때 그 시절 - 1987

"기자들은 용감했다"

     
 
 
 
 

서슬 퍼런 군사 독재정권 시절, 기자들은 용감했다.
매일 보도지침을 하달 받던 시절, 받아쓰기 틀리면 군홧발로 짓밟히던 그때 그 시절
기자들은 독재정권에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였으며, 모순을 자각할 줄 아는 의식과, 불의에 맞서는 용기가 있었다. 미화라고 욕하지 마라 큰맘 먹고 선배들 자랑한다. ‘베껴 쓰기’ 기레기에게도 필봉이 있고, 꺾이지 않는 기개가 있는 법. 적어도 기레기에게 의식이 살아 있는 것은 오래전 '받아쓰기' 선배들의 용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를 기획했던 경찰은 1987년 1월 15일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에게 2단 스트레이트로 한방 크게 얻어맞는다. 당황한 경찰은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황당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경찰을 비웃듯 17일 동아일보에는 당시 논설위원이었던 김중배의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제목의 칼럼이 올라온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 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 줄기로, 살아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흑흑흑 … 걸려오는 전화를 들면, 사람다운 사람들의 깊은 호곡이 울려온다. 비단 여성들만은 아니다. 어떤 중년의 남성은 말을 잇지 못한 채 하늘과 땅을 부른다. 이 땅의 사람다운 사람을 찾는다. 그의 죽음은 이 하늘과 이 땅과 이 사람들의 회생을 호소한다. 정의를 가리지 못하는 하늘은 ‘제 하늘’이 아니다. 평화를 심지 못하는 땅은 '제 땅'이 아니다. 인권을 지키기 못하는 사람들은 ‘제 사람들’이 아니다. 이제 민주를 들먹이는 입술들마저 염치없어 보인다. 민주는 무엇을 위한 민주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하늘과 땅을 가꾸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민주를 들먹이기 이전에 인권을 말하자. 그 유린을 없애고, 그 죽음을 없애는 인권의 소생을 먼저 외쳐야 한다. (...) 인권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어김없는 사람의 사람다운 도리인 것이다. 그 사람의 도리를 어기는 땅에선 어떤 찬란한 이데올로기도 무색할 뿐이다(...)”
일세의 명문이라고 불리는 김중배의 칼럼은 당시 군사정권의 탄압에 숨죽여던 시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완곡하지만 감성적인 표현으로 시민들의 양심에 호소하며 박종철 군 추모 열기에 한몫한 것이다.
감성적인 표현 속에는 사회를 지배하던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문이 담겨 있다. 인권(人權)의 가치를 말함으로써 군홧발에 짓밟혀 있던 휴머니티를 부각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반공을 지배 논리로 내세우던 제5공화국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든다. 즉 박종철 군에 대한 애도 속에는 군부 정권에 대한 날선 비판과 자유에 대한 희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시대는 바뀌었고, 군홧발 대신 돈뭉치가 기자들을 옥죄어온다. 때로는 돈 몇 푼의 중압감에 펜대가 휘어진다.  그럼에도 기자는 비루한 마음 달래며 꺾인 필봉을 다시 핀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고는 어김없이 기사를 써 내려간다. 더 좋은 취재, 더 좋은 편집을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아는 기자다.

신성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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