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대전민예총 이사장

 

지난 금요일 우유와 포스트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며, 전날 비가 와서 포기했던 산행을 해야지 하며 하루 일정을 계획하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침부터 누구지?’ 하며 전화를 받으니『만다라』의 작가 김성동 형이다.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우벚고개의 가파른 언덕 위 외딴집 생활을 청산하고, 옥천면 용문산 입구로 이사를 한 뒤 찾아보지 못한 터라 마음이 찔렸다. 더구나 당뇨가 심해져 지인이 줄기세포 임상치료 대상자로 소개해줘 일본을 오가며 치료한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더 면목이 없었다. 나의 무심함을 꾸짖으려니 하며 “건강은 어떠시냐”고 물으니, 대뜸 어머니가 어제 저녁 열반하셨다는 부고를 전한다. 토요일에 성남 화장장으로 발인을 한다니 양평병원 장례식장에 곧장 다녀와야 했다.

평소처럼 맞벌이를 하는 아들 집 청소를 한 뒤 출발하기로 하고 집을 나서는데 친구 이은봉 시인이 소식을 듣고 연락을 했다. 금년 8월 말 광주대에서 정년을 맞는데, 전날 수업을 끝내고 세종에 있는 집에 와 있으니 함께 양평으로 가잔다. 서둘러 청소를 마치고 집에 와 검정 양복을 입고 세종시에 가니 약속시간인 오전 11시가 조금 넘었다.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이은봉 시인인지라 최근 문단에서 벌어지는 미투운동에서부터 충청도 정치인의 수난사까지 다양한 뒷얘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자그마한 시골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대개의 조문객이 밤에 오다 보니 점심 무렵의 빈소는 한적했다. 칠십대의 백발인 김성동 형과 누님이 검은 상복을 입고 우리를 맞이한다. 순탄치 않았던 결혼생활이어서인지 성인이 됐을 아들 미륵이와 딸 보리는 보지 못하고, 영정 속 노모를 향해 합장하고 절을 올렸다. 뛰어난 천재로 소학교만 마치고 독학으로 영어·수학을 공부해 숙명여전 교수를 하던 남편 김봉한은 남로당 지도자인 박헌영의 복심비선(腹心秘線)으로 대전·충남의 야체이카(세포)로 활동하다 예비검속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산내 뼈잿골에서 희생됐다.

그 뒤로 평생 속병을 얻어 고생을 하며 모진 삶을 살아온 그녀의 삶이 마침내 안식을 얻게 된 것이다. 성동 형이 살던 구도리 집을 찾으면, 김영호가 우리 아들 술을 먹여 힘들게 한다며 내 앞에서 타박을 해 나를 무안하게 했던 기억이 난다. 서울로 이사를 간 뒤 세검정 집에 갔다 미륵이가 실수로 방문을 잠갔을 때, 베란다 난간으로 나가 창문을 넘어 문을 열어준 뒤로 비로소 타박의 대상에서 벗어났었다. 양평의 외딴 집 앞에서 혼자 밭을 매시던 모습을 멀리서 뵌 뒤로 요양원에 모셨다는 얘길 들었으니, 중년의 영정 사진과는 퍽 달랐을 노년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는다.

영정 앞에 향을 피우다 보니 향로 위쪽으로 어머니의 모진 삶에 대해 쓴 단편 「민들레 꽃반지」가 게재된 계간지 <창작과 비평>이 놓여 있다. 그의 어머니 한희전은 남편의 예비검속과 학살 이후 얻은 속병 가슴앓이에 평생 시달렸고, 인민공화국 시절엔 독립운동 애국자의 유가족이라며 인민공화국 사람들이 시켜 조선민주여성동맹위원장을 맡았다가 8년 징역을 살았고, 그 고문 후유증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97년의 길고도 모진 삶에서 벗어나 마침내 안식을 얻었으니, 풍채 좋고 도량이 넓으며 늘 부드러웠던 남편이 그녀에게 정표로 준 민들레 꽃반지를 끼고 그녀의 삶에서 가장 빛나던 그 짧은 시절의 행복을 함께 추억하고 있으리라. 김성동은 이 작품으로 제1회 ‘이태준 문학상’을 수상했다. 「민들레 꽃반지」는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을 살린 문장으로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을 처연하면서도 뼈아프게 보여주어 작품의 밑절미가 이태준 문학정신에 가장 닿아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성동은 오래 전에 중단했던 대하소설 『국수』를 결국 마무리해 출간을 앞두고 있다. 조선조 말 전통 예인들의 희망과 좌절을 당대의 풍속사 속에 생생한 조선말로 재현해내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는 작년에 아버지의 행적을 그린 중편소설 『고추잠자리』를 발표하면서 부모의 한 많은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그는 이제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이른바 ‘해방 8년’의 우리 민족의 굴곡진 현대사를 그린 역사소설을 계획하고 있다. 우리 땅 어느 곳에서나 질긴 생명력으로 자라나 왕성하게 번지는 민들레 같은 민초들의 삶을 그린 역작을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