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팬주룽의 마지막 전쟁③

(이 작전이 통한다면 지금쯤 고다리는 반드시 올래를 비우고 지싱으로 군대를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망새는 갑자기 군대를 돌리라고 명령했다. 군사들은 영문을 몰라 잠시 불안했지만 대망새를 믿고 순순히 따랐다. 회군의 이유를 병사들에게 일러주지 않았음으로 군사로 위장한 댕글라의 염탐꾼들은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대망새는 지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임시로 지어놓은 막사들을 그대로 남겨 두라고 지시했다. 일종의 위장술이었던 것이다.

대망새는 빠르게 군대를 이동해 올래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올래에는 남아있는 부족민들을 감시하기 위한 댕글라군 백여 명이 있을 뿐이었다. 대망새가 올래로 무혈입성함으로써 지정학적으로 매우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더구나 올래는 식량의 원천인 바다와 바다로 통하는 거대한 수로를 중심으로 살찐 들판이 있다. 이 들판은 대망새의 머릿속에 잠잠하게 들어있는 미래의 풍요를 보장해줄 절중(節中)한 수단이었다. 특히 폭이 넓은 거대한 수로는 지싱으로 건너간 고다리의 공격을 일차적으로 차단해줄 수 있는 최고의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올래에 남아있던 댕글라의 잔당들을 아주 간단하게 포로로 만든 대망새군은 남아있던 부족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대부분이 어리거나 노약자들이었던 그들 중에는 과거 비죽군의 정규군가족도 있었고, 보충병군 가족도 있었다. 그러나 대망새군이 입성함으로써 다시 평등한 관계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과거 보충병 아들을 둔 죄로 정규군 아들을 둔 친구에게 발로 걷어 채였던 노인이 이번에는 자신을 발로 걷어찬 노인을 슬쩍 밀어 넘어뜨렸다. 할근거리며 옥신각신 싸우는 노인들의 은빛머리 위로 뾰로통한 석양이 내려앉았다.

“……”
대망새와 참모들은 버섯지붕에 모여 대책회의를 거듭했다. 병사들은 강가 이곳저곳에 철통같은 수비진을 치고 있었다. 미리은은 대규모 요리부대를 급조해 맛있는 해산물들을 내놓았다. 바다에서 자라지 않은 병사들에게는 신이 내린 음식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병영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빛이 없는 새벽, 분기탱천한 고다리는 대망새군의 임시 막사를 지나 밤새 지싱으로 달려갔다. 고다리는 철거하지 않은 임시막사를 보고 대망새와 비죽이 연합했음을 굳게 믿었다. 작은 개천을 넘어 지싱의 들판은 죽은 자들의 세상인 듯 싸늘하고 스산한 기운이 낮게 떠다녔다. 대규모 고다리군이 횃불을 근덕거리며 지싱의 들판에 진을 쳤다. 가까운 거리에 고다리군 못지않은 횃불집단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것들이 비죽과 대망새놈일 것이다. 야, 푸른돌!” 그냥 밀어붙이자는 의미였다. 푸른돌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싱의 들판에 횃불잔치가 벌어졌다.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에 횃불들이 긴 꼬리를 매달고 혼불처럼 흘렀다. 그러자 반대편에서도 횃불들이 난잡하게 움직였다.
비죽은 들판에서 달려오는 불덩어리가 고다리의 군대인지 대망새의 군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양편의 횃불들이 합쳐져 분연한 불꽃을 피워댔다. 그들은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찌르고, 베고, 깨물고, 집어던졌다. 그들의 전쟁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어느덧 여명이 밝아오고 서로를 확인한 비죽과 고다리는 깜짝 놀랐다. 있어야할 대망새군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멈춰, 멈춰라!” 고다리와 비죽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싸움이 멈추자 모든 상황이 파악됐다. 대망새에게 속은 것이다. 이 전쟁에서 수적으로 열세였던 비죽의 병사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갔다. 죽은 병사들은 대부분 올래의 부족민들이었다. 아군끼리 벌인 전쟁의 상황은 참담했다.

남은 병사는 양측을 합쳐 천삼 백 명 남짓이었다. 고다리는 머리통이 터질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천 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칭송하던 댕글라의 영웅, 팬주룽을 일사천리로 발아래 꿇려버린 고다리였다. 그러나 고다리는 이상하게 화를 표출하지 않았다. 비죽은 물론 장수들을 때리지도 않았다. 주먹 만 한 눈을 부릅뜨고 송충이 눈썹을 희룽거리지도 않았고, 눈빛은 오히려 깊고 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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