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신 한남대 사학과 명예교수

◆ 고려와 거란의 갈등
당(唐) 멸망 후 중국은 5대 10국 분열기를 거쳐 북방엔 거란이, 이어서 남쪽엔 송(宋)이 등장했다. 거란은 916년에 나라를 세우고 925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켰으며 이어 993년(성종 12) 10월, 고려를 침입했다.

당시 고려는 압록강변에 관방을 축조하고 친송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송과의 결전을 눈앞에 두고있던 거란으로서는 고려와 거란과의 군사동맹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어 먼저 고려를 공격했던 것이다.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은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영토를 영유했는데 고려가 거란 강토를 침탈했고 이 때문에 거란군 80만이 도착했으니 빨리 거란 군영에 와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80만 대군이라는 허황된 말에 놀란 고려조정은 서경 이북의 땅을 할양하기로 했으나 서희는 한 번 결전을 시도한 후에 할양해도 늦지않다고 강경하게 반대했다. 이에 성종은 조건부 강화 방침을 세우고 서희를 거란진영에 파견했다.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 계승국이고 고구려 땅을 거란이 점유하고 있는데 고려가 압록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힘과 거란과 접경하고 있으면서 송과 교류함을 지적했다. 이에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옛 터전으로 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에 도읍해 서경이라 했다고 해 고구려 계승을 강하게 피력했다. 그리고 거란과의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 사이에 살고있는 여진 때문임을 강변하며 고려도 거란과 국교를 맺을 의사가 있음을 피력했다. 거란과의 교류를 약속함으로써 고려는 안북부에서 압록강 동쪽에 이르기까지 280리 영역을 확보하는 실익을 얻을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거란은 단순히 영역양보에 그치지 않고 변경지대의 요충지를 포기한 것으로 고려의 일방적인 외교 승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 서희의 외교에 대한 평가
서희는 이천 사람으로 960년(광종 11)에 과거에 합격해 성종 때 내사시랑평장사를 거쳐 내사령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가장 큰 활약은 거란장수 소손녕과 담판, 거란을 물리친 일이었다. 그 결과 994년(성종 13)부터 3년간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귀화진·곽주·귀주·흥화진 등에 성을 쌓아 고려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외교란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국력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상례다. 나라를 세운 지 60여 년이 지난 거란이 외교에 미숙해 서희의 의도에 끌려 들어갔다고 판단하긴 어렵다. 그들이 양보했다면 그것이 그들에게 유리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는 태조이래 북진정책을 계속해 성종 초에는 압록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에 거란은 위치상 고려 수중에 들어갈 게 뻔한 강동 6주를 여진을 몰아낸다면 고려가 소유해도 좋다고 해 일면 양보하는 듯 하면서 고려가 압록강 이북으로는 진출하지 못하도록 제동을 가했다. 태조가 거란과 단교한 것은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그 이면에는 고려가 고구려 옛땅을 수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교해 국경선이 정해진다면 후일 고려가 북진정책을 계속하려 할 때 불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로써 판단하건대 거란과의 강화는 북진정책의 의지를 접어야 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서희는 최선을 다해 회담했고 나름 최대의 양보를 받아냈지만 그의 강화는 고려 국경선을 한정시키고 항구화해 북진정책을 어렵게 만든 일면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또 여진족을 내?음으로서 고려민으로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서희가 실책을 범했다는 게 아니라 대규모 군사력을 앞세워 침략한 거란에 밀린 고려왕조의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거란의 입장에서는 고려와 강화를 맺음으로서 이후 송과의 전쟁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으며 고려 영토를 압록강 유역으로 한정시키는 효과에 만족했다고 판단된다.

이후 거란은 송과 주변 여진족을 제압한 이후 압록강 유역의 영토를 고려의 것으로 인정해준 사실을 무위로 돌리고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면서 수차례 침입했다. 그러나 강감찬 등이 이끄는 20만 고려군의 대규모의 반격으로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은 참패하고 물러갔다. 이후 두 나라는 화약을 맺어 거란이 멸망할 때까지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고려는 외국과의 전쟁에서 쉽게 굴복하지 않고 적극 대응했음을 거란과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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