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후

오세영

긴 겨울 방학도
속절없이 끝나는구나
내일 모레가 개학날인데
해 놓은 숙제는 아무 것도 없다.
입춘 되어
학교에 모인 나무들은
화사한 꽃잎, 싱싱한 잎새,
달콤한 꿀,
제각기 해 온 과제물들 펼쳐놓고 자랑이지만
등교를 하루 앞둔 나는 비로소
책상 앞에 앉아 본다.
사랑의 일기장은 텅 비었다.
베풂의 학습장은 낙서투성이
개학해서 선생님을 뵙게 되면
무어라고 할까
방학도 다 끝나가는 날,
이것저것 궁색한 변명을 찾아보는 노경(老境)
어느 오후.
 

노경(老境)입니다. 인생의 늘그막입니다. 어느 날 문득 시인은 이런 생각에 젖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다 가는 일이 학교생활로 친다면 방학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죽어 저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은 개학이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승에서 한 평생 살다가는 인생을 ‘겨울방학’이라 하고, 죽어 저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을 ‘개학’이라고 합니다. 시인의 발상이 이렇게 독특합니다.
겨울이 다 가고 봄이 되어 개학을 앞둔 자연은 조물주가 내준 과제를 다 했습니다. ‘화사한 꽃잎, 싱싱한 잎새, 달콤한 꿀’까지 마련해 놓고 자랑합니다. 그렇지만 개학을 하루 앞둔(이제 곧 죽어 저 세상으로 돌아갈) 시인은 아무 것도 한 게 없어 쓸쓸합니다. ‘사랑의 일기장은 텅 비었고, 베풂의 학습장은 낙서투성이’입니다. 그러니 이걸 어쩌면 좋을까요? 이승에서의 삶(방학)도 다 끝나 이제 곧 죽어 저승에 가야 하는데 숙제를 하나도 안 했으니, 가서 선생님(조물주)에게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요?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쏜살같이 가버린 인생이 정말 아쉽기만 한 오후입니다. <시인, 아동청소년문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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