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이후 한반도는 두 국가로 분열됐다. 국민은 당장 먹을 게 없을 정도로 경제상황은 열악했다. 당장의 목적은 입의 풀칠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먹을 걱정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이 시행됐고 결국 한강의 기적을 낳게 됐다. 원동력은 ‘빨리빨리’였다. 목적지까지 최대한 빠른 속도를 냈고 50년 만에 경제를 지원받던 나라에서 경제를 지원해주는 나라로 성장했다. 한국의 빠른 경제 성장 바탕은 대기업 중심의 성장이었는데 이는 대기업의 기업윤리 결여란 부작용을 낳게 했다. 속도에 너무 집중했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선 속도가 중요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속도에 집중한 작지만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대청호오백리길에선 속도를 중요시하지 않아도 된다. 작지만 중요한 것들이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에 있다.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은 3구간 종착지인 더리스에서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길이 잘 나 풍경이 아름다운 게 특징이다. 사진 찍기 좋은 명소도 세 군데나 된다. 4구간은 첫 출발지에서 도로변으로 나와 차로와 함께 시작한다. 대청호가 바로 옆에 있어 시원한 시야를 제공한다. 대청호를 바라보며 천천히 발길을 옮기면 첫 번째 사진 찍기 좋은 명소를 소개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 부근은 드라마 ‘슬픈연가’를 찍었던 장소로 유명해 굳이 이 곳이 아니더라도 카메라를 들게 하는 풍경이 곳곳에 있다.

시즌3에서도 소개했던 바람의 언덕도 이 부근에 위치했다. 바람의 언덕은 대청호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이 있지만 비경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 하다 보면 피오르 해안과 리아스식 해안처럼 굽이굽이 아름다운 길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놓칠 수 있다. 바람의 언덕까지 이어지는 굽은 길을 바라보며 첫 번째 목적까지의 걸음은 단순히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걷는 것보다 지루함이 덜하다. 대청호의 출렁임이 만든 길이 조금이나마 형태를 변형하는 모습이 눈을 못 떼게 한다. 단순히 좋은 사진을 찍고자 걸음을 재촉했다면 볼 수 없는 소소한 풍경이다. 소소한 풍경에 눈이 익으면 이젠 거대한 풍경을 볼 차례다.

바람의 언덕으로 다가갈수록 비밀을 꼭꼭 숨겨둔 동화 속 숲에서나 상상할 듯한 큰 나무들이 대청호를 가린다. 거대한 대청호를 향한 시선을 전면 차단하고 오로지 높은 나무와 그 사이를 비집는 바람소리만이 이곳을 차지한다. 울창한 침엽수의 숲을 지나 스산한 바람소리까지 뚫고 나오면 한 눈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의 거대하고 푸른 대청호가 시각을 즐겁게 한다. 숲속을 거닐던 스산한 바람소리는 정제되지 않아 청량하게 청각을 자극한다. 눈과 귀를 시원하게 하는 대청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카메라를 들게 한다. 시기를 잘못 알고 찾아온 철새와 조금 일찍 자신의 영역을 확인하고자 나온 텃새가 대청호 위를 거닐며 정제되지 않은 바람에 출렁이는 대청호에 다시 한 번 잔잔하게 출렁임을 내보낸다.

바람의 언덕을 등지고 호반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4구간에서, 아니 대청호오백리길 전체 구간에서 가장 유명한 추동습지보호구역이 나온다. 4구간의 두 번째 사진 찍기 좋은 명소다. 추동의 옛 지명은 가래울이다. 여기서 가래는 호두를 뜻하는데 이곳은 예전부터 호두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가래울을 한자로 바꾸면서 호두나무를 뜻하는 추(楸)와 마을을 뜻하는 동(洞)이 합쳐져 지금의 지명인 추동이 됐다. 추동에선 아직 제철이 오지 않았다는 슬픔에 갈대와 억새의 은빛은 잔잔하게 자신의 시기가 오기를 기다리며 고개를 숙인 게 마음을 제법 숙연하게 한다. 갈대와 억새는 풀이 죽었지만 길섶엔 새싹을 틔울 꽃망울이 아가처럼 예쁜 얼굴을 내밀고 고개를 들어 숙연해진 마음을 이내 달랜다. 갈색의 데크길, 은색의 갈대와 억새, 초록색 줄기 위 샛노란 꽃망울이 어우러진다.

추동을 나오면 본격적인 구간 걷기가 시작된다. 잘 정돈된 데크길이 4구간 전체를 보호하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걷기 좋다. 겨우내 옷을 헐벗은 나무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새싹이란 노랗게 예쁜 봄옷을 입을 준비를 마쳤다. 다른 나무는 꼬까옷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샛노랗게 입은 봄옷을 자랑하기 바쁘다. 목적지까지의 여정은 한참이나 남아 발걸음을 재촉할 만도 하지만 곳곳에서 살필 수 있는 작은 즐거움에 눈을 빼앗긴다. 데크길이 끝나는 지점에선 흙길이 나타난다. 대청호오백리길 어느 구간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길이다.

주변에선 대청호반을 걷는 나그네를 경계하듯 작은 강아지들이 큰 울음소리로 견제한다. 한 마리가 짖기 시작하니 다른 강아지들도 제 영역에 쳐들어왔다는 인식 때문인지 목청껏 소리를 쏟아낸다. 강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발에 채찍질을 가하며 그들의 영역을 빠져나온다. 누군가 즈려 밟고 간 흔적을 따라 흙길을 걷기 시작하면 대청호는 어느새 모습을 감춘다. 오롯이 산의 울창함은 흔적이 사라진 대청호를 대신한다. 낙엽을 뚫고 나온 새싹의 신비로움을 벗 삼아 대청호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담백한 시골길의 멋스러움이 또 한 번 시야를 사로잡고 빨라졌던 발걸음은 다시 느려진다. 느려진 발걸음은 주변을 집중하게 만들고 주변에 집중하느라 발걸음은 더욱 느려지는 기분 좋은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든다.

걸음걸이가 점차 느려져 갓난쟁이가 처음 걸을 때의 속도까지 떨어졌을 때 대청호와 황새바위에서 재회한다. 이 구간에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사직 찍기 좋은 명소다. 이 바위는 대청호반을 바라보고 있는 황새의 형상을 해 이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인근엔 거북이 모양의 거북이바위도 위치했다. 유독 황새바위와 거북이바위 근처엔 바위가 제법 있어 바위산이라고도 불린다. 황새바위 바로 옆엔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곳에선 4구간에서 대청호를 제일 가깝게 볼 수 있다. 눈을 감으면 출렁이는 소리까지 들려 대청호가 아닌 동해의 어느 한적한 곳에 놀러온 기분을 들게 한다. 황새바위를 지나면 금세 연꽃마을에 다다르고 이곳부턴 정돈되지 않은 듯 하면서 예쁘게 잘 정돈된 길이 시작된다.

굽이치는 길목마다 정갈하게 다듬은 나무울타리는 대청호, 나무와 어우러지고 중간 중간 위치한 돌길은 이질감보단 대청호반의 일부처럼 잘 융화됐다. 한걸음 뗄 때마다 색다른 시야를 제공한다. 거대한 나무, 대청호, 울타리가 구도마다 색다른 매력을 제공한다. 어떤 구도는 양떼만 있으면 강원 대관령의 어느 목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다른 구도는 초록의 천막을 덮은 울창한 밀림 한 가운데의 시야를 선보인다. 또 억새와 갈대가 강조된 다른 구도는 봄을 훌쩍 넘어 여름과 가을 사이의 어딘가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 역시 천천히 걸음으로 느낄 수 있는 감성이다. 그렇게 다양한 풍경을 즐기는 사이 4구간의 종점인 신상교를 목전에 뒀다. 목적지인 신상교는 대청호를 가로지르는 뚝방인데 이날은 늘어난 수위로 반쯤 잠겨 건너지 못했다. 발걸음을 돌려 신상동인공습지로 향한다. 대청호오백리길을 배경으로 한 걷기축제에서 결승점이었던 곳이다. 신상교를 건너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남았지만 ‘천천히’의 경험을 느끼게 했던 4구간의 교훈 역시 마음 속 깊이 아로새겼다.

◆4구간 보고서
4구간의 장점은 길이다. 누가 봐도 정말 아름답다. 거창한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소소하면서 미소짓게 만드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4구간 중반부터 계속 펼쳐진다. 길과 함께 융화되는 대청호, 그리고 자연환경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좋아할 게 분명하다. 길을 중심으로 한 콘텐츠를 개발한다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하자면 강점인 길을 더욱 정비·정돈한다면 4구간에서 느꼈던 아름다움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어보인다.
대전에 있는 대청호오백리길 구간인 1~5구간 중 사진 찍기 좋은 명소도 세 군데나 되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만큼 풍경이 뛰어나다는 뜻인데 사진 관련 콘텐츠를 발굴하는 것도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만한 요소다. 슬픈연가 촬영지, 추동습지보호구역, 황새바위는 물론 연꽃마을, 신선바위 등 대청호의 자랑거리가 몰려있다. 특히 대청호는 시간마다, 계절마다 색다른 풍경이 장점이어서 사진 관련 콘텐츠는 사시사철 진행이 가능한 콘텐츠가 될 수 있다.

글=김현호 khh0303ggilbo.com
사진=김현호·정재인 기자·영상=정재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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