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2018년 4월 1일은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 99주년이 되는 날이다. 충남지역 3·1운동의 경우 3월 2일 부여를 시발로 4월 30일까지 14개 군과 88개 읍·면에서 전개됐다고 한다.

기미년인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는 천안·진천·청원·연기 주민 3000여 명이 모여 3단계로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는 항일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1단계는 4월 1일 오후 1시 무렵 시작됐다. 조인원은 시장 군중 앞에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시위 군중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에 태극기를 달고 이를 앞장세워 거리를 누볐다.

시장에서 약 50보 정도 떨어진 병천 헌병주재소의 소산(小山) 소장 등 일경 5명은 만세 소리에 놀라 시장으로 출동해 해산을 요구했으나 시위대가 불응하자 즉시 발포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두 번째 단계는 오후 4시경으로 사상자들의 친지들이 시신을 헌병 주재소로 옮기고 항의하자 김교선·한동규·이백하·이순구 등이 군중 100명과 함께 주재소로 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고, 사망자에 대한 조치와 구금자 석방을 요구했다. 군중이 늘어 1500명에 이르렀을 때 헌병들이 권총을 발포해 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시위대는 헌병 보조원 맹성호와 정수영에게 동족으로 같은 민족을 죽이느냐고 항의했고, 유관순은 주재소장을 잡아 낚아채면서 항의했다. 세 번째 단계에선 군중이 아우내장터 부근 산과 시장에 모였다가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절단했다.

일본 헌병과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고, 총검을 휘둘러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이 19명에 달했다. 유관순 열사는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를 비롯한 7명의 친인척을 잃었다. 김구응 의사와 노모 최정철 지사도 독립만세 시위 현장에서 순국했다. 그리고 3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20여 명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조인원·유관순·유중무 각 3년 형, 김용이·조병호 각 2년 6개월 형, 김교선·한동규·이백하·이순구 각 2년 형, 김상훈·백정운 각 1년 6개월 형, 조만형·박제석 각 8개월 형, 김상철 6개월 형 등을 언도받았고, 유관순은 부당한 재판 결과를 거부하면서 저항한 끝에 법정 모독죄가 추가돼 7년 형을 선고받았다.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은 호서지방 최대 규모로, 독립선언서를 지역화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필자가 3·1운동을 조사·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2018년 3월 29일 현재까지 기미년 3·1운동 당시 지방에서 독립선언서를 자체 기초해 선언한 것으로 밝혀진 곳은 경남 함안과 하동을 비롯해 3~4곳에 불과하다. 그리고 유림 대표인 이백하 선생이 구국동지회 명으로 자체 제작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는 539자로 길이는 짧지만 항일독립만세 시위에 주민들을 많이 동원하기 위해 선동적 언어가 많이 기술돼 있고, 한민족의 굳건한 항일독립 의지와 기개가 담겨 있다. 또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는 지역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 아주 중요한 사료로 인식된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던 구국동지회의 실체를 밝히지 못하고,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원본을 찾지 못해 한국 항일독립운동사에 남긴 위대한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천안시와 국가보훈처는 20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 100주년에 대비, 전국적으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원본 찾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로 하여금 구국동지회의 실체를 밝혀내고, 2009년 천안시 병천면 병천리 일원에 조성된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에 독립선언서 전문을 새겨 놓은 기념비를 건립해야 한다. 또 해마다 3월 1일 개최되는 봉화제 때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해 아우내장터 항일독립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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