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봉 시인, 전 대전문인협회장

▲ 문희봉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살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취직, 사업, 결혼 등 그럴 때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에서 심한 좌절과 절망을 경험한다. 이웃의 한 여인에게 “왜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라고 물으니 그녀는 “이 일이 제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인생이 한 번은 넘어진다. 그렇다고 포기는 안 된다.

어떻게 견디고 살았을까 싶을 만치 힘들고 어려웠던 일도 조용히 눈을 감고 당시를 추억하다 보면 더욱 생생하고 애틋한 그리움으로 가슴에 남아 나를 설레게 한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이고 고통스러운 삶의 질곡에 서 있다 할지라도 결코 이겨내지 못할 일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환희에 젖는다. 그렇다. 시련이란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매일 해가 떠서 지는 것만큼이나 불가피한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이 봄눈 녹듯 그런 것들을 녹여준다.

강풍도, 강설도 지우지 못하는 저 산하의 푸른 눈빛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행복이다. 그걸 행복이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이다. 분홍 호접란이 내 마음처럼 아름답게 피어 있는 거실에서 음악 흘려놓고 지난 세월을 반추해 보는 삶은 어떤가.

가진 것의 조금을 잃었을 뿐인데 자신의 전부를 잃었다고 절망하는 것은 남이 갖지 못한 것이 보이지 아니함이요, 남이 가진 것과 비교해 조금 덜 가짐에서 오는 욕심이다. 비워야 할 것을 비우지 못한 허욕 때문이다. 포기와 버림에 익숙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평생 쓰다 버린 새끼 도막 하나 욕심 내 본 적이 없다면 최상의 삶이 아니겠는가.

생사를 넘나드는 기로에 서있는 사람들의 자기실현 방법은 참으로 소박하다. 비록 평생 일어서지 못한다 할지라도 살아 숨 쉬고 있음 그 하나가 간절한 자기실현의 목표가 되고, 살아 있음 그 하나만으로도 더없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보면서 자신을 채찍질한다.
봄비 그친 숲이 진한 향기를 내뿜는 보문산 단풍나무 옆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가느다란 눈에 매달린 작은 이슬방울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 반짝임을 반짝임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가련한 사람이다. 자연의 품에 안겨 자연과 소통할 수 있음은 여유를 갖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한낱 사치일 뿐이다. 나는 신비한 자연이 만들어 내는 한 폭의 수채화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 행복한 순간이다. 이때 사랑하는 사람 곁에 앉아 있으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나는 소리를 듣게 되는 영광까지 함께한다.

남의 가슴에 들어 박혀 있는 큰 아픔보다 내 손 끝에 있는 작은 가시의 찔림이 더 아픈 것이다. 그러기에 다른 이의 아픔의 크기를 가늠하긴 어렵지만 더 이상 자신만의 생각과 판단으로 스스로를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는 일을 한다는 것이 우매한 짓임을 깨닫고 실소를 금치 못한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아쉬움도 많았고, 후회와 한탄으로 가득한 시간이었을지라도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 날의 새로운 소망이 있기에 더 이상은 흘려보낸 시간들 속에 스스로를 가둬 두려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픔 없이 살아온 삶이 어디 있으랴. 지나간 시간 속에 무디어지지 않는 아픔이 어디 있으랴. 긍정의 생각을 하다 보면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아픔과 슬픔마저도 진정 그리워질 때가 있다.

병실에서 아스라이 꺼져가는 핏줄의 생명선이 안타까워 차라리 이 순간을 내 삶에서 도려내고 싶었던 기억마저도, 그런 모습이라도 잠시 내 곁에 머물 수 있었던 그때가 그립다. 가족들의 이야기가 도란거리며 개울을 따라 흐른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동심의 세계로 빠져드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부족함 투성이로 아옹다옹 살았어도 차츰 멀어져가는 현실의 정들이 아쉬워 사탕 한 알 서로 먹으려던 시절이 그리운 것은 사람 사는 정이 있었기에 그럴 것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기에 더 애틋함으로 다가온다. 사는 일이 이런 것이라며 주어진 고통의 터널을 헤쳐 나가려 안간힘을 쓰던 때에는 지금보다 패기가 있어 좋았고 당당함이 있어 좋았다.

그 어려움의 시간들을 좋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지금은 지나가고 없는 젊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혹하고 흔들리고 사랑하는 인간의 연약함이 사무치게 아름다워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사랑을 하며 시를 쓴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