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에서 강력한 군사력은 물론 뛰어난 문화로 국력을 자랑했던 백제.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수많은 나라처럼 역사 속에 패자(敗者)로 기록됐다. 강력한 기마병을 주력으로 중국과 힘겨루기까지 했던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뛰어난 문화를 일본에 전파했을 정도로 백제 역시 전성기를 구가하는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동맹국에게 배반을 당하고 결국 왕이 사로잡히는 굴욕까지 맛본 백제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혹자는 이야기 한다. 동맹국의 배반이 없었다면 한반도를 통일한 국가는 백제였다고.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는다. 백제의 ‘슬픔의 역사’는 그렇게 대청호 인근에 뚜렷이 새겨졌다. 백제의 후예가 슬픔의 역사를 걷기엔 너무나 괴로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슬픔의 역사를 마주함으로써 찬란했던 백제의 역사는 오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내일도….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은 다른 구간과 달리 두 번 나눠서 소개한다. 5구간의 출발점은 4구간 신상교 인근 흥진마을 입구에서 시작한다. 흥진마을은 대청호 갈대와 억새, 그리고 청명한 대청호가 자리 잡은 초입이 유명하다. 흙길은 정비된 듯 정비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특징이다. 기분 좋은 부드러운 흙길이 발을 편하게 해주고 불그스름한 햇살과 은색의 억새, 색을 잃은 삭막한 노란 갈대가 대청호에 반짝이는 자태는 탄식을 부르게 한다. 

호수 특유의 바람이 물의 살짝 비릿함을 가져오지만 터질 것 같은 꽃망울의 봄 내음이 흥진마을을 찾아온 나그네를 설레게 한다. 발걸음은 가볍지만 시야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느라 바짝 다가온 봄을 천천히 느낀다. 

자칫 심심할 수 있을 때마다 벤치와 정자가 나와 나그네를 한량으로 만든다. 이런 기분 좋음을 평생 느낄 수 있다면 백수건달이라고 욕해도 좋으리란 마음이 한 가득이다. 흥진마을 둘레길을 절반 정도 돌면 논과 밭, 그리고 이제 막 농사를 시작하는 아낙네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겨우내 쉬었던 땅을 달래기라도 하듯 흥얼거리는 콧노래는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과 조화로운 선율로 귀를 간질인다. 

가뜩이나 길지 않은 3.1㎞의 흥진마을 구간이 빠르게 끝나버리고 신상교가 다시 나온다. 흥진마을 초입에 있던 5구간 출발지의 신상교와는 다른 것으로 현재 신상교가 세워지기 전 흥진마을민이 작은 하천을 건너기 위해 쓰인 작은 다리다. 이 부근은 예전부터 바깥아감이라 불렸고 내비게이션에 검색하면 나올 정도로 현재도 쓰인다. 

지명의 유래는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생긴 산을 마을 사투리로 아감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에서 출발한다. 흥진마을은 아가미산 안쪽에 있어서 안아감, 흥진마을 바깥은 아가미산 바깥에 있다고 해 바깥아감이라고 부른다. 바깥아감을 지나면 대청호오백리길에서 험하다면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의 백골산이 나타난다. 5구간을 두 편으로 나눠 소개하는 이유는 바로 백골산 때문이다. 대청호의 수많은 산과 마찬가지로 높지 않아 보이지만 곳곳에 가파른 언덕이 백골산의 특징이다. 이곳을 가벼운 마음으로 오른다면 이름처럼 절망을 맛보기 쉽다. 

백골산을 오르기에 앞서 숨을 충분히 고르고 또 고른다. 발걸음을 떼자마자 우거진 초록의 숲이 머리 위 태양을 다 가려버린다. 백골산이란 이름 때문인지 보통의 산과는 다르게 유난히 햇살이 이곳을 지나치지 않아 등에 젖은 땀은 금세 식은땀으로 바뀌어 체온을 앗아가 으스스해진다. 

나무마저 음침한 백골산…. 대청호 건너 서쪽엔 백제시대 때 주요 방어 거점 중 하나였던 계족산성이 위치한단 점을 감안하면 이곳 역시 계족산성의 전초기지였고 큰 전투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높은 오르막이 연속으로 이어지자 잡생각을 떨치고 백골산 정상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다. 따스했던 봄의 기운은 이곳에서 느끼기 쉽지 않다. 흘렸던 땀이 식어 등골을 타고 내려갈 땐 오히려 찬기가 온 몸에 내려앉는다. 

대청호라도 보며 마음을 다 잡고 싶어도 높게 솟아 시야를 가린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경험을 두세 번 했을까. 정상에 다다른다. 백골산을 오르는 동안 시야를 가렸던 음침했던 나무는 정상에서야 모습을 감춘다. 드디어 대청호의 거대한 모습이 드러난다. 조금 확 트인 시야를 위해 두리번거리다 넓은 터가 있는 곳을 발견하고 짐을 내팽개치고 곧장 달려간다. 밑으로 푸른 대청호와 색색의 지붕,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벚꽃까지 한눈에 담겨 즐거운 피로감을 육안에 넣는다. 

 

 

 

제법 높아진 수위로 대청호가 출렁이는 모습의 역동감도 이곳에선 눈앞처럼 펼쳐진다. 백골산에 들어서고 느끼지 못했던 따스함이 다시 한 번 몸을 감싼다. 충분히 대청호를 눈에 담고 내팽개쳤던 짐을 챙기고자 발걸음을 돌린다. 백골산성이 이곳에 있었고 기념물 22호로 지정됐음을 알리는 표지가 닳고 닳아 쓸쓸이 자리했다. 기념물로 지정됐다면 나름의 역사가 이곳에 있었을 거라 생각하고 휴대전화를 들어 백골산의 유래를 찾아본다.

시기는 5세기 중후반으로 돌아간다.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를 쳐들어와 한강 부근을 차지하고 백제의 개로왕은 결국 죽임을 당한다. 이 때부터 백제는 고구려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았고 수도를 웅진으로, 성왕 땐 다시 부여로 천도한다. 당시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고 힘을 키운 백제는 신라와 함께 한강을 공격해 하류는 백제가, 상류는 신라가 차지했다. 

당시 고구려는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아 전력을 북쪽으로 향해야 했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의 동맹이 껄끄러웠다. 이 동맹을 깨기 위해선 백제와 신라 중 하나를 회유해야 했는데 백제와는 개로왕 사망으로 이미 철천지원수여서 결국 몰래 신라와 내통했다. 언젠간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도 결판을 내야 했던 신라는 고구려의 밀약을 받아들였고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을 통해 백제가 회복한 한강 하류지역을 공격해 뺏었다. 

이에 격분한 백제의 성왕은 왕자인 여창과 함께 신라를 치기로 했다. 비운의 전투인 관산성전투의 시작이었다. 초반엔 백제의 연전연승이었다. 여창의 뛰어난 무술실력이 발휘됐던 것이다. 전투 중반에 들어서 백제는 희대의 실수를 저지른다. 당시 백제는 현재의 백골산에 주둔했다. 당시 백골산 뒤편엔 금강이 있었는데 식수를 조달하기 쉬웠고 여차하면 계족산성으로부터 원군을 기대할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김무력이 뛰어난 실력으로 백제군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후퇴를 하고자했으나 금강은 퇴로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성왕은 김무력군에게 잡혀 참수 당했고 왕자인 여창은 병사를 모아 대응했으나 계속된 전투로 몸져누워 있어 제대로 된 몸상태가 아니었다. 또 김무력을 지원하기 위해 백골산 인근에 주둔하던 신라군에게 둘러싸이고 만다. 

왕을 잃고 왕자마저 제대로 된 실력을 보이지 못하자 백골산에 갇힌 백제군에게 남은 건 신라군의 도륙뿐이었다. 신라군에게 무참히 짓밟힌 백제군의 시신은 3만 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고 대청호오백리길 2구간의 피골이란 명칭과 백골산의 한 봉우리 이름인 강살봉(江殺峰)이란 지명이 피의 역사와 절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백제는 동북아 국제질서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처참한 백제의 역사를 알고 난 뒤 따스한 봄과 햇살이 부담스러울 정도의 처참함이 밀려온다.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한 발걸음 역시 무거워진다. 전쟁은 살육과 정복의 역사라지만 왕을 잃고 퇴로까지 끊긴 백제군에게 행한 신라군의 행동은 현재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슬픔 역시 당시 새겨졌던 또렷한 역사의 일부다. 

백골산 정상에서 느낀 처참함을 뒤로하고 빠르게 하산한다. 5구간의 절반인 방축골까지는 고작 1.2㎞로 20~30분이면 하산할 수 있다. 백제의 한이 슬픔과 한이 서린 이곳을 걷는다는 건 절대 봄의 어느 날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 백제는 패망의 길로 사라졌지만 백제가 남긴 유산의 찬란함은 그들의 후예라면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사진=노승환·김현호 기자
영상=정재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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