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동부보훈지청 오시윤

두 발을 자연에 담아 1000미터가 넘는 산 위를 걷는 사람, 존 프란시스는 22년간 도보.

여행과 17년간의 침묵여행을 통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을 바꾸는 여정을 시도한다. 기름띠로 범벅이 된 바다생태를 목격하고,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고자 자연으로 떠나는 여행을 선택하여 대자연에 온몸을 맡기며 그동안 익숙한 생활에서 벗어난 그는 이제야 진정한 자유를 자연에서 깨닫는다.

이처럼 자유선택의 여지에 따라 우리의 삶은 매우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일상의 반복적 삶에 익숙하면 그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남들이 세상의 일과 타협하며 적당히 안주할 때 나만의 깨끗함만을 추구하며 살아남기란 더욱 쉽지 않은 것이다. 일찍이 본래의 착한 성품을 지키고 탐욕의 유혹에서 벗어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한때의 있고 없음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소박한 삶을 충고한 다산 정약용은 재물을 오래 보존하는 방법은 오히려 남에게 베푸는 것이라 하며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며 진정한 자유의 삶을 택하고 부당한 물질적 부의 축적을 경계하였다. 또한 38년간 공직에 있으면서도 변변한 집 한 채 없이 노년을 맞이하였으나 장례비조차 없었다는 청백리 박수량, ‘나는 초야에서 태어나 벼슬까지 올랐으니 그 영화는 과분하니 내 죽거든 비석도 세우지 마라’며 마지막 유언을 남긴 그의 청빈한 삶과 맑은 마음을 기리는 백비가 지금도 전해온다.

벼슬의 유혹을 단칼에 거절하고 낙향하여 청빈과 검소한 생활로 생을 마감한 하서 김인후선생, 세 필의 말만으로 부임행차를 하며 비록 관직에 있으면서도 어떤 재물을 탐내지 않고 오직 청렴과 효심 깊은 관리로 살아온 송흠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청백리들이 있다.

‘적게 갖되 충만하게 살아라’,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라’라는 말은 결국 청렴한 삶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 그러한 삶을 살아온 이들의 공통점은 대중의 생활습관과 도덕기준보다도, 자신의 엄격한 규범을 지키면서 사회에 저항하며 자신에게 닥친 일을 결코 불행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가지고 있는 소유물(지위, 권력, 재물 등)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아는 수준이나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실천하고 행동하는 삶을 지향하여야 한다. 햇빛만으로도 충분히 익어가는 영혼, 적은 재물로도 풍요로운 삶,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며 가난하고 힘없는 자의 편에서 함께 동행하고 공유하는 공동체적 삶을 일컫는다.

청렴(淸廉)의 삶이란 바로 나 혼자 잘살겠다는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삶이 아니라, 타인을 먼저 우선시하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한다고 볼 수 있다. ‘각각이 자유롭되 서로 함께 있어도 해치지 않는 열린 태도’라고 할까? 기득권이 누린 지배적 사회모델에 종속되어서는 청렴의 삶에 접근이 어렵다.

‘보편적 인류 속에 들어서는 자는 행복하다. 자기 안의 진짜 인간, 헐벗은 인간, 우애 깊은 인간, 타인과의 관계를 가장 큰 재산으로 여기는 인간이 드러날 수 있도록 버릴 줄 아는 인간은 행복하다. 그래서 가난이 행복이다. 이는 인간적 삶의 원초 조건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데에 있지 않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임마누엘 수녀의 <풍요로운 가난>에서) 우리는 가난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훨씬 더 귀 기울이게 된다.

청렴의 사전적 의미는 ‘성품이 고결하고 탐욕이 없음’이다. 즉 고상하고 순결하게 타고난 됨됨이로의 본성을 지키며 지나친 욕심이 없는 삶으로 초대받을 수 있는 공직자가 되어야 한다.

충남동부보훈지청 오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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