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인도네시아에서 휴가 3년

금강일보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효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임석원의 자전적 에세이 ‘나는 내 아내가 너무 좋다’를 온라인판을 통해 연재합니다. ☞본보 2017년 8월 9일자 10면 보도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세대로, 임석원의 에세이는 그 시대에 태어나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도 많았겠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한 가지도 해 보지 못한 채 오직 가족만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한 남자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곁에서 묵묵히 좋은 동반자가 되어 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을 전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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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인도네시아에서 휴가 3년

싱가포르에서 귀국 후 2년이 지난 어느 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그랜드 하얏트 호텔 공사 현장의 관리부장으로 근무하던 전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 부장은 사우디 하일 현장에서 내가 신입사원이나 다름없었던 때 나의 직속 상사였기에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는 싱가포르지사에 먼저 나가 근무하면서 싱가포르 래플시티 현장으로 나를 불렀었다. 이번에는 인도네시아에 먼저 나가 있다가 자카르타 그랜드 하얏트 호텔 현장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가족 동반이 안 돼 안 나가겠다고 했더니 전 부장은 조만간 가족 동반이 허용될 것이니 나오라고 했다. 나는 일단 파견근무로 나가 일하다가 가족 동반이 안 되면 귀국하는 조건으로 출국했다. 그 당시에는 가족 동반이 이뤄지지 않아 나는 결국 6개월 근무 후 귀국했다. 소장과 전 부장이 나의 귀국을 만류했지만 나는 아내를 또 혼자 살게 할 수 없기에 가족 동반이 되면 다시 나오겠다고 했다.

내가 귀국해 2년쯤 지나면서 해외근무자의 가족 동반이 회사 규정으로 확정됐다. 거의 같은 시점에 인도네시아 발리 인터콘티넨탈 리조트 호텔 공사의 수주가 확정되자 동 현장 소장으로 내정된 강 부장께서 나를 찾아왔다. 이미 내가 근무하는 자재부의 부장과 인사부장에게 나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니 발리 현장에 함께 나가자고 했다. 강 소장은 사우디 리야드 지사와 싱가포르 현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사람이었기에 서로를 잘 알았다. 2년 전에 가족 동반이 되면 나간다고 했으니 나가야지.

1990년 9월 대전에 내려가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는 출국을 했다. 그리고 3개월 지난 1990년 12월 아내와 딸 지영이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왔다. 아내는 “후진국인 인도네시아에서 어린 딸을 어떻게 키우나?” 하는 약간의 두려움을 안고 지영이를 데리고 나왔다. 인도네시아라는 나라는 ‘울면서 왔다가 울면서 떠난다’는 나라다. 처음에 올 때는 “열대지방의 더운 날씨와 풍토병 위험 가운데 의료시설이 우리나라만큼 발달되지 못한 나라에서 어떻게 사나?” 걱정하면서 오지만, 와서 살다 보니 너무나 살기 좋은 곳이어서 몇 년 살고 떠날 때는 떠나고 싶지 않아 너무 아쉬워하며 떠난다는 뜻이다. 아내의 인도네시아 생활도 그랬다.

처음에는 모든 게 어설펐다. 날씨도 평균 기온이 섭씨 30도로 항상 덥다. 피부가 가무잡잡한 인도네시아 사람들과는 말도 안 통한다. 지리를 아는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내는 자유롭게 밖에 나갈 형편이 안 돼 집에만 있자니 답답했다. 그러나 교회의 같은 구역 식구들과 또 회사의 직원 가족들과 교류가 시작되자 모든 게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우선 가정부 두 명이 -시골에서 올라온 가정부들은 외국인 집에는 말이 안 통하니 두 명씩 한집에 들어온다- 음식과 빨래와 청소 등 집안일을 다 맡아서 한다. 아내는 ‘뇨냐(사모님)’로서 손에 물 댈 일이 없다. 기사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한국에서는 웬만한 중견기업 회장님, 사장님의 사모님이나 누릴 수 있는 대우를 받고 산다. 국민소득이 낮아 물가가 싼 나라에서 우리나라에서 받는 급여의 약 두 배가 되는 해외 급여를 받으며 살게 되니 생활이 여유롭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우리 한국 사람들이 엄청나게 잘사는 줄 안다. 우리 남자들에게는 “뚜안(주인님)”이라는 칭호로 부르며 굽실거린다.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가 아니라면 어디 가서 이러한 대우를 받고 살아본단 말인가?

아내의 하루 일과는 대개 이렇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 씻고 출근하려고 준비하면 아내도 그제야 일어나 씻는다. 가정부가 전날 저녁에 아내한테 지시받은 대로 아침 식사를 차려 놓는다. 아내와 나는 함께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다. 가정부는 과일을 깎아 후식으로 갖고 온다. 과일까지 함께 먹고 나는 출근하고 아내는 지영이를 깨워 씻기고 아침을 먹인다. 지영이와 함께 교회 부설 유치원에 간다. 유치원에서 선생님으로 -급여를 받지 않는 봉사 직분- 아이들을 가르치며 오전을 지내고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온다. 오후 시간에는 같은 구역 식구들과 왕래하며 지낸다. 금요일엔 쇼핑 간다고 나에게 자동차를 보내달라고 전화를 한다. 딸 지영과 일본 소고(SOGO) 쇼핑센터에 나와 살 것들을 사고는 호텔 인도네시아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하며 논다. 나는 퇴근을 하면서 수영장으로 간다. 나도 얼른 수영장에 들어가 한 시간쯤 수영을 한다. 우리는 샤워를 하고 나와 외국인들과 현지 부유층 사람들이 주로 가는 괜찮은 식당이나 한국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우리는 그 당시 중국식 해산물 식당으로 자카르타에서 제일 크고 유명한 ‘늘라얀’(Nelayan, 어부라는 뜻)이라는 중국 해산물 식당에 제일 많이 갔다. 이곳은 딸 지영이가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는 안 먹고 놀다가 늦게서야 (어떤 때는 화장실에 가서 응가를 하고 와서) 먹곤 하던 기억이 생생한 곳이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지영이가 늦게 찾을 것에 대비해 지영이가 잘 먹는 음식을 남겨 놓는다. 그리고 지영이가 늦게 먹기 시작할 때 “야! 뒷북쟁이! 또 뒷북치는구나! 음식 따뜻하게 나올 때는 안 먹고….”라고 핀잔을 주며(?) 남겨 논 음식을 먹이곤 했다. 가끔씩 교회 식구들과 어울려 또는 회사의 직원 가족들과 만나서 함께 외식을 하기도 한다. 교회 식구들과는 ‘파레고(Parego)’라는 일본식 뷔페식당에, 회사 식구들과는 매리어트 호텔(Marriott Hotel) 뷔페식당에 자주 갔다.

아내는 교회 식구들과는 거의 매일 만났다. 말 그대로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며 천국에서와 같은 삶을 산다. 외국에 나와 있으니 무엇보다도 시어머니로부터 전화 부름이 없다. 시집 식구들을 만나 긴장하거나 신경 쓸 일이 없다. 거꾸로 하루가 멀다 하고 교회 사람들과 어울려 사랑을 나누며 산다. 교회에서는 봄·가을로 자카르타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뿐짝(Puncak)이라는 곳에 가서 야외예배를 드리고 체육대회를 한다. 뿐짝은 해발 3000m가 넘는 산의 중턱에 있는 시원한 휴양지다. 그 당시 인도네시아의 정치·경제도 안정적이었고 경기도 좋았다. 한국에서 인도네시아로 나오는 기업들도 많아 교민사회 살림도 넉넉해 인심도 좋았다. 교회에서 준비하는 먹거리는 아주 풍성했고 나눠주는 선물도 거의 한 집에 한 개 이상씩 돌아갈 정도로 여러 기업체에서 많이 찬조해 쌓였다.

추석과 설날, 한국의 두 큰 명절에는 회사 직원들과 온 가족들이 뿐짝 휴양지의 큰 별장을 빌려 놀러 간다. 남자들은 몇 개 팀으로 나눠 골프를 치고 여자들도 두 팀 정도 골프를 친다. 골프를 하지 않는 여자들은 저마다 특색 있게 짓고 가꿔진 별장들을 둘러보며 산책을 즐긴다. 아이들은 풀장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며 깔깔거리고 논다.

아내는 인도네시아에 휴가를 온 셈이다. 결혼 초 시어머니의 무자비한(?) 시집 교육과 철저한 통제 속에 남편 급여의 반만 갖고 살던 시절 근 1년, 그리고 오로지 남편의 가정을 위해 남편을 해외에 보내 놓고 그 많은 남편의 해외 급여는 구경도 못하고 월 3만 원의 용돈을 타 쓰며 외롭게 고생하던 시집살이 2년을 보상받는, 3년 동안의 일생일대 휴가였다.

더욱 알찬 일은 내가 출국하기 전 아내가 분당 시범단지의 33평 아파트 분양에 당첨된 것이다. 해외 급여를 받으니 아파트 분양대금은 전혀 걱정 없이 불입됐다. 내 월급은 인도네시아에서 우리 세 식구가 사는 데 반, 한국에 있는 통장으로 반이 들어갔다. 한국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3개월마다 한국 통장에 쌓인 돈에서 중도금을 기분 좋게 갖다 내시기만 하면 됐다. 내 돈이 넘쳐 동생네 아파트 사는데 1000만 원을 빌려주기까지 했다. 큰아들이 잘 벌고 새집을 장만하면서 또 동생 집 장만하는데 돈을 빌려주기까지 하는 모양을 보는 부모님 마음은 얼마나 뿌듯했겠는가? 또 아내가 인도네시아로 나오면서 서울 집을 전세 놓고 전셋돈은 사업하는 처남에게 빌려줬다. 장인·장모님께도 든든한 딸과 사위 노릇을 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던가? 이렇게 동생들을 도우면서도 아내는 인도네시아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으니 얼마나 옹골진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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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석원은...

1956년 지리산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대전고와 한남대를 졸업한 후 1980년 S그룹 S건설에 입사해 23년을 근무하면서 사우디·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8년간 생활했다. 2003년 영국 유통회사 B&Q 구매이사, 2004년 경남 S건설 서울사무소장으로 일했다. 2009년 H그룹 H건설에 입사해 리비아에서 자재·장비 구매업무를, 2011년 E그룹 E건설에 입사해 중국과 동남아 대외구매를 담당했고, 2013년에는 전북 J건설 소속으로 사우디에서 근무했다. 지금은 34년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미군부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분당 판교지역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인생 후반기엔 ‘책 읽고 여행하고 글 쓰는 삶’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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