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그리스 건축 문화

◆그리스 안의 로마…하드리아누스(Hadrianus)의 개선문

그리스는 로마의 샘이었다. 힘센 로마는 카르타고(Carthago)를 누르면서 지중해 온 세상을 얻게 됐다.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에서 건너온 수많은 전리품들은 로마를 부유하게 만들어 줬다. 없는 게 없었지만 무언가 목말랐다. 로마에는 깊은 아름다움이 없었던 것이다.

땅값이 재개발로 올라가면서 때 부자가 돼버린 졸부처럼 로마는 그 부유함을 가치 있게 누릴만한 문화가 없었다. 그러다가 아드리아 해(Adriatic Sea) 건너 척박한 땅에서 벌어지는 지식의 향연을 마주하게 됐다. 바로 그리스였다. 로마는 그리스를 힘으로 정복 했지만 문화로는 범접할 수 없었다. 로마는 깊은 두려움에 빠졌다. 이렇게 마케도니아(Macedonia)처럼 그리스에 먹혀버리는 건 아닐까. 이 때문에 철저히 준비해 그리스 문화를 로마 문화로 접붙이기 시작했다. 오비디우스(Ovidius)와 베르길리우스(Vergilius)를 시켜 그리스 문화가 결코 로마로 직수입되지 않도록 이론적 정립을 시켰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 신화라 말하지 않고 로마 신화라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로마 신화’라고 통칭하게 된 건 그런 연유에서였다. 로마 문화의 승리다. 세련됨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돼있다. 이건 문화의 법칙이기도 했다. 이 법칙을 로마는 철저한 준비로 막아냈다. 대단하다 못 해 기적적인 결과였다. 안되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식으로 변화시켜버리는, 결코 직수입을 열지 않는 로마의 철저함이다. 열등한 자의 신세한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로마가 만지면 로마의 것이 된다는 성실한 로마를 보여줬다.

밤에 봐도 낮에 봐도 썰렁한 개선문은 하드리아누스가 그리스에 선물한 것이다. 아래는 로마식인 아치와 벽이 받치고 있고 그 위엔 삼각형 페디먼트(Pediment)와 도리아 식 기둥이 그리스임을 말하고 있다. 개선문 북쪽에는 ‘여기는 아테네, 테세우스(Theseus)의 고대 도시’라 적혀있고 남쪽은 ‘여기는 테세우스가 아닌 하드리아누스의 도시’라 쓰여 있다. 저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 언제 찍어도 흡족하지 않은 도시흉물이었다.

로마는 그리스를 담기엔 거칠었다. 건축은 그들이 놓일 자리를 안다. 그러나 인간이 인정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 앉혀두어 사고가 나는 것이다. 그다지 건물이 필요 없는 온화한 그리스에서 건물 높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어진 건물들이 각 위치마다 스스로 필요한 만큼만 자리 잡고 올라갔다. 그러나 그 건축의 비밀을 하드리아누스는 알지 못했고 제 건축 위에 그리스 건축을 올려 그리스의 수호자인양 공포하며 결국에는 그리스의 절대자가 되고 싶어 했다. 이렇게 아테네 곳곳 하드리아누스의 건물들이 지어졌다. 도서관이 생기고 광장이 생겼다.

그러나 우리는 한눈에 알 수 있다. 로마는 그리스에 졌다. 있는 멋 다 부렸으나 폭격 맞은 여신의 자태에도 밀리고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로마의 배려는 로마의 굴욕이 됐다.

미국은 자신들이 자르고 나온 영국 본토를 그리스로 봤다. 아무리 돈을 벌고 치장해도 본토 영국의 우아함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기죽지 않았다. 스스로를 로마로 여기며 독수리를 상징으로 삼고 열등감을 또 다른 기폭제로 전환하며 걸어 나갔다. 맥도날드 미국이라며 저가의 초스피드 문화라는 손가락질을 받아내며 미국은 끝내 로마와 같은 대국의 모습을 갖춰갔다. 안되면 되도록 이어가는 로마가 부활했다. 이게 미국이었다. 역사에 묻고 배운다.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을 마주하다

사진은 목포근대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목포영사관이다. 나는 이 건물을 볼 때마다 로마식 건축위에 놓여 진 그리스 식 신전형태인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이 끝없이 떠오른다. 이제는 이곳부터 일본 땅이라는 뜻이었을까. 섬뜩했다. 일본은 분명 그리스를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 유럽을 이용해 조선을 누르려 했다. 왜냐면 그따위 허술한 일본 문화로 찬란한 조선을 누를 수 없다는 걸 진작 알았기 때문이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기 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해 강한 문화가 약한 문화를 삼킨다는 것을 알았던 일본이었다. 그 연구 결과 조선은 그 계획아래 철저하게 무너졌다. 원래부터 무능했던 것처럼.

조선은 결코 무능하지 않았다. 찬란했다. 이것은 나의 표현이 아니다.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마지막 조선총독의 말이었다. 그는 다시 한반도에 돌아오겠다고 하며 떠났다. 그의 손자가 아베신조(安倍晋三)다. 그들은 다시 이 나라로 돌아오고 있다. 두렵다. 무섭다.

◆기둥 열전

그리스는 일 년 내내 제법 따뜻하다. 지중해의 축복이었다. 그러다보니 벽의 개념보다 기둥과 열주가 건축의 중심이었다. 기둥과 기둥사이 간격은 자연스러운 공간구획이 됐고 천막하나만 치면 개별공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전의 경우 막을 치고 장사하는 공간도 아니었다. 지붕과 벽이라는 공간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한국 사람이 보면 신전은 참 쓸모없는 공간이었다. 사실 내가 봐도 신전 열주는 역할이 없다. 굳이 찾자면 ‘멋짐’뿐이다. 그런데 그게 신전열주의 최대역할이다. 하늘을 향해 두 손 높이 들어 경배하는 인간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이거면 된 거지 기능은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내 새끼 첫 발을 떼던 날의 영광이랄까. 사람으로 태어나 돌 지나면 걷는 것이고 짐승은 태어나자마자 벌떡 일어난다는데 그게 뭐가 대단할까싶지만 자식 낳아본 사람은 안다. 그 견적도 안 나오게 불안한 핏덩이가 하늘을 등이 아닌 머리로 이고 그 조그만 발로 첫 발 떼던 경이로운 순간을. 이 순간이 파르테논(Parthenon)이었다. 기둥이 기둥일 것이지 이름은 또 왜 그리 많은지. 딱 쉽게 도리아, 이오니아(Ionia), 코린트(Corinth)만 기억하면 된다. 돌로 만든 든든한 40대 남자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장식 없이 장중한 양식이 도리아다. 파르테논이 여신을 위한 공간이었기에 장식 없는 남성미 물씬 나는 건 도리아기둥이였다. 멋진 조화였다.

곧이어 다가온 양식이 이오니아양식이다. 이오는 ‘소’라는 뜻이니 소뿔이 소용돌이 친 걸 생각하면 쉽다. 30대의 우아하면서 아직 젊음을 잡고있는 기둥이었다.

그리고 코린토스 양식은 돈 많은 코린트에서 시작한 가장 늦은 시기의 양식이다. 흡사 우리나라 돌산 갓김치 같은 아칸서스 나뭇잎이 가득 올라앉은 기둥이었다. 화려함으로는 압권이고 20대의 화관을 쓴 아가씨와 같았다. 이 기둥은 그리스에 비해 기본이 부족했다 여겼던 열등감 많은 로마가 많이 사용했던 기둥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코린트식 기둥은 그리스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살짝 배가 나온 나 같은 도리아가 좋다. 우리식으로 배흘림양식이고 엔타시스(Entasis)라고 한다. 어찌 알고 고려시대에는 그리스 엔타시스를 한반도에 펼쳐 배를 흘리게 했을까. 그래서 나도 앤틱(Antique)하게 살려고 그리스답게 배를 흘리고 있는 걸까. 오늘도 당당하게 그리스처럼 앤타시스하게 배를 흘려보낸다.

글·사진=김기옥 님(협동조합 사유담(史遊談))

정리=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