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본 성숙한 정치의 조건

도편추방법(Ostrakismos)

같은 사람 이름 6000표가 나오면 10년 간 추방을 당해야하는 이야기 속 공식적 왕따는 사실이었다. 도편추방법은 독재자를 미연에 방지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훗날 정적 제거의 방법으로 악명을 떨쳤다. 심지어 당첨(?)되고 나서는 변론 기회나 이유를 설명할 기회도 없이 10일 안에 아테네를 벗어나야만 했다. 페리클레스(Perikles)가 가장 잘 활용했던 방법이었고 본인에겐 한 번도 적용되지 않았던 왕따 놀이였다. 도편에 쓴 이유는 종이가 이집트에서 수입되는 값 비싼 사치품 파피루스(Papyrus)여서다. 하지만 이마저도 강제성이 없는 시민권고법에 불과했다. 도편 속 이름 가운데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가 자주 눈에 띈다.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에서 명장으로 우뚝 선 그는 누구의 미움을 그리도 심하게 받은 걸까.

아리스티데스(Aristeides)같은 경우 어느 글 모르는 노인에게 아리스티데스라고 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써주면서 왜 미워하게 됐냐고 물으니 인기가 너무 많아 나였어도 반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벌어지는 일이다. 대학시절 단과대 학생대표 선거에 친구가 출마했다. 나는 얼굴 아는 친구를 찍기로 했지만 당일 날 친구의 원산지도 희미한, 한복인지도 희미한 인민군 복장에 가까운 계량한복을 보며 마음을 돌렸다. 저런 패션 감각이라면 학생회 임원으로서의 감각도 의심스러웠다고나 할까. 내가 이렇게 뇌가 없었다.

그리스의 시간, 클렙시드라(klepsydra)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한 둘일까. 아고라(Agora) 광장에 가면 장사도 한창이고, 정치도 한창이었다. 모두 자기가 중심이라는데 그 옛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천지였겠지.

정식 절차를 거쳐 변론의 기회가 주어지면 정신을 차려야했다. 한 얘기를 반복하면 불리해졌다.

6.4L 분량의 항아리에 가득 물을 부으면 아래로 쏟아 지는데 6분이 걸렸다. 억울하다면 그 안에 나의 입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눈물은 금물이다. 그럼 시간이 없어진다. 감정을 조절하고 야심차게 의견을 펼쳐라. 똘똘한 그리스였다.

우리나라에도 있다. 마이크가 자동으로 꺼져버리는 제도였다. 여기저기 그리스다. 그리스가 대단한 건 항아리 아래구멍이 아니고 윗구멍이다. 어떤 양을 쏟아 부어도 일단 같은 양을 맞추고 보는 평등의 구멍이었다.

배심원단의 선출, 클레로테리아(Kleroteria)

클레로테리아는 평평한 돌로 만들어진 추첨 기계였다. 각 판 면엔 가로 11개의 집단이 있다. 시민이 가지고 다니는 동()으로 만든 신분증명 티켓(Pinakia)을 꽂아 넣으면 구슬이 굴러 나온다. 흰 구슬이 굴러나오면 배심원의 자격이 주어졌다. 이 기계로는 평의회 의원(국회의원)도결정됐고 조작이라는 단어는 들어서지 못했다. 시민이면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지금 소수 엘리트만이 이끌어가는 한국정치에 경종을 울리는 제도였다. 누구나 성실하게 한자리에 오래 있다 보면 생활의 달인이 된다. 어느 누구보다도 내 일은 내가 제일 잘 알 수 있다. 인생에 한번쯤 나의 생각도 정치가 되는 체험이 시민의 자존을 높여줬던 그리스였다. 많이 배웠다고 도덕적이던가, 돈이 많다고 이성적이던가, 그 지식과 그 돈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많이 배우고 누린 자들은 선할 것이라는 가설은 이론도 아니다. 기회의 균등, 그것이 지금 절실히 필요하다.

저 똘똘한 슬롯머신은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저 돌덩어리 앞에서 나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 부푼 마음이 그리스 시민의 자부심이 됐겠지. 로또보다 훨씬 값진 뽑기다.

·사진=김기옥 님(협동조합 사유담(史遊談))

정리=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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