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본 성숙한 정치의 조건
◆도편추방법(Ostrakismos)
같은 사람 이름 6000표가 나오면 10년 간 추방을 당해야하는 이야기 속 공식적 왕따는 사실이었다. 도편추방법은 독재자를 미연에 방지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훗날 정적 제거의 방법으로 악명을 떨쳤다. 심지어 당첨(?)되고 나서는 변론 기회나 이유를 설명할 기회도 없이 10일 안에 아테네를 벗어나야만 했다. 페리클레스(Perikles)가 가장 잘 활용했던 방법이었고 본인에겐 한 번도 적용되지 않았던 왕따 놀이였다. 도편에 쓴 이유는 종이가 이집트에서 수입되는 값 비싼 사치품 파피루스(Papyrus)여서다. 하지만 이마저도 강제성이 없는 시민권고법에 불과했다. 도편 속 이름 가운데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가 자주 눈에 띈다.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에서 명장으로 우뚝 선 그는 누구의 미움을 그리도 심하게 받은 걸까.
아리스티데스(Aristeides)같은 경우 어느 글 모르는 노인에게 ‘아리스티데스’라고 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써주면서 “왜 미워하게 됐냐”고 물으니 “인기가 너무 많아 나였어도 반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벌어지는 일이다. 대학시절 단과대 학생대표 선거에 친구가 출마했다. 나는 얼굴 아는 친구를 찍기로 했지만 당일 날 친구의 원산지도 희미한, 한복인지도 희미한 인민군 복장에 가까운 계량한복을 보며 마음을 돌렸다. 저런 패션 감각이라면 학생회 임원으로서의 감각도 의심스러웠다고나 할까. 내가 이렇게 뇌가 없었다.
◆그리스의 시간, 클렙시드라(klepsydra)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한 둘일까. 아고라(Agora) 광장에 가면 장사도 한창이고, 정치도 한창이었다. 모두 자기가 중심이라는데 그 옛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천지였겠지.
정식 절차를 거쳐 변론의 기회가 주어지면 정신을 차려야했다. 한 얘기를 반복하면 불리해졌다.
6.4L 분량의 항아리에 가득 물을 부으면 아래로 쏟아 지는데 6분이 걸렸다. 억울하다면 그 안에 나의 입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눈물은 금물이다. 그럼 시간이 없어진다. 감정을 조절하고 야심차게 의견을 펼쳐라. 똘똘한 그리스였다.
우리나라에도 있다. 마이크가 자동으로 꺼져버리는 제도였다. 여기저기 그리스다. 그리스가 대단한 건 항아리 아래구멍이 아니고 윗구멍이다. 어떤 양을 쏟아 부어도 일단 같은 양을 맞추고 보는 평등의 구멍이었다.
◆배심원단의 선출, 클레로테리아(Kleroteria)
클레로테리아는 평평한 돌로 만들어진 추첨 기계였다. 각 판 면엔 가로 11개의 집단이 있다. 시민이 가지고 다니는 동(銅)으로 만든 신분증명 티켓(Pinakia)을 꽂아 넣으면 구슬이 굴러 나온다. 흰 구슬이 굴러나오면 배심원의 자격이 주어졌다. 이 기계로는 평의회 의원(국회의원)도결정됐고 ‘조작’이라는 단어는 들어서지 못했다. 시민이면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지금 소수 엘리트만이 이끌어가는 한국정치에 경종을 울리는 제도였다. 누구나 성실하게 한자리에 오래 있다 보면 생활의 달인이 된다. 어느 누구보다도 내 일은 내가 제일 잘 알 수 있다. 인생에 한번쯤 나의 생각도 정치가 되는 체험이 시민의 자존을 높여줬던 그리스였다. 많이 배웠다고 도덕적이던가, 돈이 많다고 이성적이던가, 그 지식과 그 돈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많이 배우고 누린 자들은 선할 것’이라는 가설은 이론도 아니다. 기회의 균등, 그것이 지금 절실히 필요하다.
저 똘똘한 슬롯머신은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저 돌덩어리 앞에서 나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 부푼 마음이 그리스 시민의 자부심이 됐겠지. 로또보다 훨씬 값진 뽑기다.
글·사진=김기옥 님(협동조합 사유담(史遊談))
정리=이준섭 기자 ljs@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