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대전민예총 이사장

천직으로 여긴 교직생활을 교육민주화의 신념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힘겹게 보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서명으로 경고장을 받는 걸 끝으로 정년퇴임한 뒤, 아내와 부지런히 해외여행을 다니고 있다. 그간 동유럽을 시작으로 서유럽과 북유럽, 그리고 터키를 둘러봤으니, 유럽의 얼개는 대략 그릴 정도가 됐다. 유대인들이 땅 끝으로 믿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벼르다가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반도를 먼저 여행하게 됐다. 친한 후배 부부가 홈쇼핑 광고를 보다가 발칸 여행상품을 보고 우리 몫까지 예약했다기에 흔쾌히 함께했다.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매뉴얼을 먼저 보고 이해해야만 비로소 손이나 발이 움직이는 세대라서, 먼저 도서관에서 발칸반도에 대한 역사서나 여행 안내서를 찾았다. 연예인 여행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통해 발칸의 빼어난 풍광이 알려져 한국인들의 발길이 잦아졌지만, 그 풍광 속에 발칸의 역사까지 아우르는 안내서는 흔치 않았다. 좀 오래된 역사서와 최근의 여행기를 함께 읽다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프랑스보다 조금 작은 유럽 변방의 발칸반도는 대륙과 해양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요충지로 끊임없는 외세 침략과 수탈을 겪었고 최근까지 내전을 겪은 ‘유럽의 화약고’라는 점에서 우리 한반도와 닮았기에 더욱 그랬다. 다행히도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의 섬’ 한반도에 평화의 봄이 오고 있으니, 발칸에서 새로운 역사적 교훈을 찾을 수 있으리란 생각에 무거운 마음을 떨쳐냈다. 이번 여행은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의 교훈을 얻는 이른바 ‘다크 투어’인 셈이다.
발칸반도는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이 충돌하면서 상호적대시하는 작은 나라로 갈라지는 이른바 ‘발칸화’를 겪으며 대규모의 파과와 학살을 겪었다. 특히 4년 가까이 이어진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특집기사를 읽은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 군인들이 무슬림의 씨를 말리는 잔혹한 ‘인종청소’를 자행한 것에 치를 떨었던 기억이 새롭다. 무슬림 남성은 학살하고 여성은 집단 성폭행한 뒤 기독교의 씨앗을 낳게 한다는 끔찍한 만행을 ‘신의 이름으로’ 자행했다니 숨이 막힌다. 물론 역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학살의 만행에 대한 상처가 끔찍한 보복으로 되풀이됐기 때문이다. 로마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을 등에 업고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 이주민을 대량학살하고, 세르비아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수십만의 크로아티아인을 집단학살하고, 이슬람의 오랜 식민지배에 대한 앙갚음으로 보스니아와 코소보의 무슬림을 세르비아가 학살한 것이다.
이번 여행은 오스트리아를 거쳐 발칸반도로 들어가고 다시 비엔나 공항에서 돌아오는 여정이다.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독일에 강제 합병돼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민족분단을 막고 이념대립에서 벗어나고자 10년간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받고 자주적 민족국가의 토대 위에서 영세 중립국을 선택해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와 달리 연합국의 신탁통치에 대한 왜곡과 진영 간의 극한 대립으로 자주적 발전의 기회를 놓쳤다고 역사학자들은 탄식한다. 특히 신탁(Trusteeship)이 자주적 임시정부를 구성하게 한 뒤 연합국이 5년간 후원한다는 뜻이었다니, 오스트리아보다 먼저 자주적 민족국가의 틀을 마련할 수도 있었는데 아쉽다.
발칸반도 어디나 분쟁의 아픔이 있지만 내전의 상처가 가장 두드러진 곳은 역시 보스니아다. 크로아티아 최남단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두브로브니크를 육로로 가려면 보스니아의 모스타르를 거쳐야 한다. 모스타르는 ‘오래된 다리’란 뜻으로, 네레트바강을 동서로 연결하는 아치형의 돌다리인 ‘스타리모스트’가 16세기에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세워지면서 이 도시의 상징이 됐단다. 1993년 내전으로 부서진 것을 복원했는데 다리 끝에는 ‘93년을 기억하라’는 문구가 새겨진 돌이 있다. 이제 이 다리는 전쟁의 비극을 증언해 주는 다리이자 이슬람과 기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도록 이어주는 공생을 상징한다. 우리도 이제 오랜 증오와 반목에서 벗어나 화해와 공생의 지혜를 발휘해 세계평화의 디딤돌이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복되어라 화평케 하는 자여! 신의 자녀라 일컬어질 것이라.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