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연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공문제에 진설된 ‘저산팔구상무좌사 유품’(국가민속문화재 제30-1호).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소장

4월 14일, 부여군 홍산면 홍산동헌 앞마당에서 보부상 축제가 열렸다. 지역축제답게 소탈하면서도 객을 맞는 주인의 정성이 더없이 풍성한 축제였다. 무엇보다 보부상에 대한 지역민의 경험치가 역사와 문화로 응축된 곳이어서 그런지 축제가 마치 일상처럼 느껴졌다. 이날 행사는 공문제(公文祭)라는 제사로 자못 엄숙하게 시작되었다. 곧이어 풍물패와 각설이패 등 다양한 공연과 먹거리판이 신명나게 난장을 펼쳤다.
홍산의 공문제에는 모시 생산이 많았던 부여·홍산·남포·비인·한산·서천·임천·정산 등 8읍, 즉 저산팔읍을 상권으로 활동하던 등짐장수(부상)의 연례 제사이다. 필자는 공문제에 사용할 공문 등의 유품을 진설하기 위해 참석했다. 공문제는 말 그대로 공문서를 제상에 진설하는, 보부상조직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제사로, 제상에 공문을 진설하는 것이나 제사를 ‘공문제’라 부르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그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인데, 그만큼 이 문서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은 자명하다. 금번 홍산 공문제에는 저산팔구상무좌사의 유품 중 완문(完文), 절목(節目) 등의 공문과 촉작대, 청금록, 신표 등이 진설되었다.
상인인 부상에게 ‘권리’와 ‘특전’은 그들의 이권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완문과 절목은 국가에서 이를 공증해 줄 때 사용하는 문서의 한 종류이다. 1894년(고종31)에 발급된 완문 역시 이를 내용으로 하는데,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협조한 공로로 부상청에 생선, 소금, 무쇠, 토기, 목물 등 5가지에 대한 전매권을 준다”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에는 보다 앞서 태조의 조선건국, 선조대의 임진왜란, 인조대의 병자호란 등 국가적 위기에 부상들이 등짐으로 충의를 다한 공로로 완문과 절목을 받았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조직의 정체성과 권리의 정당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여진다. 금번에 진설된 유품 중에 용비늘이 새겨진 ‘촉작대’ 역시 태조와 등짐장수 백달원의 고사에 맞닿아 있다. ‘신표(信標)’는 부상의 신분증명서와 같은 것이고, ‘청금록(靑衿錄)’은 부상조직의 역대 간부명단이다.
이처럼 공문제에 진설된 공문과 유품은 부상의 역사적 정체성과 현실적 권리와 이권, 운영체계 등과 관련된 실질적, 또는 상징적인 품목이다. 특히 완문과 절목은 오랜 세월 소외받던 부상들이 고종대에 와서야 자신의 존재를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공식문서였으므로 그 의미가 더욱 각별했다. 그리고 이 중대한 사실을 제사를 통해 선배 부상들에게 고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집안에 혼례나 과거급제 등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 지내는 고유제에 비유할 수 있다. 다만 공문을 매년 제사마다 올리는 것은 조직의 특수성 때문으로 보여진다. 즉 그 특권을 대외에 공표함으로써 타 상인집단의 침해를 배제하고, 동시에 조직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함이 그것이다.
원래 공문을 포함한 유품은 제상의 중앙에 진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금번 공문제에서는 넘쳐나는 산해진미에 밀려 집례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씁쓸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내년에는 공문제의 본뜻을 되돌아보고, ‘보부상문화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표어에 더 공감할 수 있는 축제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장을연(충남역사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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