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이사장)

 

 

당·송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이었던 소동파(蘇東坡)는 시와 서화에 뛰어난 천재였다. 북송 때 문인가문에서 태어난 그의 부친 소순(蘇洵)과 아우 소철(蘇轍)도 역시 당송 8대가로 꼽히는 명문가의 재원이었다.
① 그는 젊은 시절 자기보다 뛰어난 지성인은 없을 것이란 자만에 빠져 불교를 우습게보았다. 형주(荊州) 고을에 머물 때 소동파는 옥천사(玉泉寺)로 승호선사(承皓禪師)를 찾아갔다. 선사가 “대관의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하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자 소동파는 “나는 칭(저울)가요”라고 대답했다. “칭가라니요?” 승호선사가 반문했다. 그러자 소동파는 거만하게 대답했다. “천하 선지식을 저울질 하는 칭가란 말이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승호선사는 “악” 하고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그렇다면 지금 이 소리는 몇 근이나 되지요?”라고 되물었다. 여기서 소동파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할’ 소리가 몇 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선문답을 비롯한 마음공부에선 진실하고 곧은 마음(直心)이 중요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소동파는 불교에도 인물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남몰래 경전과 선어록을 공부했고 수시로 고승들과 친견하며 선(禪)에 대한 안목을 길렀다.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이라”고 고난이 있어야 겸손하고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생기는 법이다. 역시 소동파는 뛰어난 재주에 비해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했다.
②소동파의 ‘소똥’ 발언과 불인선사의 ‘방귀’ 법문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동파거사는 중국 역사상 유명한 문장가라 선사들과 빈번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그 중 고승인 불인선사(佛印禪師)는 소동파의 스승이자 친구이기도 했다. 불인선사는 북송 때의 유명한 선사로 법명은 요원(了元)이고 자는 각로(覺老)였다. 동파거사와 불인선사는 자주 왕래하며 차를 즐기고 도담(道談)을 나누면서 선림에 적지 않은 공안을 남겼다. 동파거사는 어느 날 금산사에서 함께 좌선을 하던 불인선사에게 갑자기 물었다. “내가 앉은 자세가 어떻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 위엄이 부처님 같습니다.” 거사가 매우 기뻐하자 선사가 되물었다. “거사님, 내가 앉은 자세는 어떻습니까?” 거사가 대답했다. “한 무더기 소똥 같은데요.” 동파거사는 스승이자 친구인 불인선사에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해 이를 무용담처럼 자랑하고 다녔다. 그러자 불심이 깊고 안목이 높은 동파의 여동생 소소매(蘇小妹)가 크게 나무라며 오빠가 졌다고 일러줬다. “그 선사는 부처님과 같으니 오라버님을 부처님으로 본 것이요, 오라버니 마음은 소똥으로 가득 차 있으니 그 선사님을 소똥으로 본 것입니다.” 서로를 부처와 돼지로 본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문답 같은 것이었다. 동파거사는 아직 ‘오직 마음뿐’(唯心)의 도리를 철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동파거사는 얼마간 정진수도하여 도통한 듯하자 불인선사에게 깨우침의 경계를 담은 시를 보냈다. “계수천중천 호광조대천(稽首天中天, 毫光照大天/하늘 중 하늘에게 머리 숙여 절하오니, 한 줄기 빛으로 천하를 비추는 이) 팔풍취부동 단좌자금련(八風吹不動, 端坐紫金蓮/팔풍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자금색 연꽃 위에 단좌하고 있네” 여기서 팔풍이란 칭찬과 나무람(稱譏), 영예와 훼손(榮毁), 얻고 잃음(得失), 고난과 즐거움(苦樂) 등 8가지 경계를 뜻한다. 이 시를 받아들자 불인선사는 “방비(放?/방귀 뀌었군: 헛소리)”라는 두 글자를 적어 보냈다. 소동파는 화가 나서 당장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불인선사에게 따졌다. 그때 불인 선사가 대답했다. “팔동취부동 일비탄과강”(八風吹不動 一?彈過江/팔풍이 불어도 꼼짝 안 한다더니, 방귀 한 방에 삐져 강을 건너왔구만.): 동파거사의 ‘소똥’(牛糞) 발언에 대해 불인거사가 방귀 한 방(放?)으로 카운터펀치를 날린 것이다. 역시 문인 도사들의 말싸움은 볼 만한 구경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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