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신 한남대 사학과 명예교수


 
이정신 한남대 사학과 명예교수

◆고려 여성의 위상
고려시대 여성의 지위는 조선시대에 비해 상당히 높았다. 우선 혼인형태에 있어서 왕실이나 일부 귀족을 제외하고는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인 사회였다. 충혜왕 대에 원의 공녀 요구를 거부하는 상소문을 올렸던 이곡에 의하면 “고려 풍속은 차라리 아들로 하여금 따로 살게 할 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으며 부모 봉양은 딸이 맡아 하는 일입니다”라고 해서 여성이 부모를 봉양하고 있음을 강조했으며 충렬왕대의 박유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처를 하나 두는 데 그치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감히 첩을 두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일부일처제가 정착하게 된 주요 요인으로는 여성이 혼인하면 친정에서 살았고, 남성이 처가에 있으면서 감히 다른 여성에게 곁눈질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또 고려시대는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다. 그러나 남자들이 부와 명예를 위해 부인과 강제로 이혼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권수평의 경우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견룡에 임명됐으나 집이 가난해 말을 살 수가 없어 사양했다. 이때 그의 친구들이 말하길 “견룡은 영광스런 직책이다. 그대가 만약 새장가를 간다면 부잣집 중에서 누가 딸을 주지 않겠는가”라고 했지만 권수평은 끝내 부인을 버리지 않아 칭송받았다. 여성에 의한 이혼으로는 충숙왕의 5번째 부인인 수비 권씨가 나온다. 그는 원래 전신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전 씨 집안이 좋지 않아 왕명에 의탁해 이혼한 후 왕비가 됐다.
또 고려엔 아들 선호 사상이 강하지 않아 조선시대에서 가장 큰 이혼의 명분인 칠거지악이 없었다. 고려시대 가계를 보면 자손없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고 아들이 없더라도 굳이 입양하지 않았다.

고려시대는 여성의 재혼 또한 별다른 장애가 없었다. 일반 여성은 재혼에 대한 법적 제한조치가 없으며 관리의 부인도 3년만 지나면 가능했다. 재혼 사례로서 성종의 6비 문덕왕후는 처음 종실인 홍덕원군에게 출가했으나 남편 사망후 성종비가 됐으며 충선왕비 순비 허씨는 평양공 현의 부인으로 3남 4녀를 낳았으나 현이 죽자 충선왕비가 됐다. 이승장의 경우 집이 가난해 의붓아버지가 그에게 생업을 도우라고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공부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 여성들은 재혼한 이후에도 당당하게 전남편의 자식을 챙겼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의 상속
고려시대 가족 내에서 여성 위상이 높은 이유는 부모 재산이 자녀 균분상속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인의 재산상속에 대한 의식을 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로 이지저와 나익희의 사례가 있다. “인종대의 이지저는 인색해 아버지가 죽은후 형제 자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고 하며 나익희는 어머니가 일찍이 재산을 나누면서 그에게 따로 노비 40구를 더 주니 “어찌 구차하게 재산을 더 얻어 자식에게 고루 은혜를 베푸시는 어머니의 덕망에 누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라며 거부했다. 경상도 안찰부사 손변의 송사에서는 남동생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누나에게 재산을 다 주고 자신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고 관아에 호소한 경우도 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재산을 받는 만큼 이에 대한 의무로서 형제간에 번갈아 제사를 지내야 했으며 부인이 자식없이 죽은 경우에는 재산은 친정으로 되돌아갔다.

고려는 양측적 친족사회로서 부계와 모계가 똑같이 중시됐던 사회였으므로 조선시대에 비해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 그러므로 호구 단자에서 자녀의 기록은 아들 딸의 순서가 아니라 나이 차에 따라 기재됐으며 남편이 죽었을 경우 당연히 여성이 호주로 기록됐다. 고려사회는 여성문제에서 볼 때 조선시대보다 더욱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사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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